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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Jul 25. 2022

'예쁘다' 얼평하면 안되는 이유

평가와 무조건적 존중


“염미정씨는 갈수록 이ㅃ....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 이게 또.”
“아! 그래도 맺음 말은 해야죠. 갈수록?”
“갈수록....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상민은 함께 회사 다녔던 동료들과 오랜만에 식사 자리를 가진다. 거기서 오랜만에 만난 미정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칭찬이 앞선다. 예전보다 더 밝아진 모습을 하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민은 이내 말을 멈춘다. 요즘에는 예쁘다는 표현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뻘쭘하게 새해 인사를 건넨다.


일명 ‘얼평’이라고 불리는 얼굴 평가는 예쁘거나 못생긴 사람의 얼굴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태도는 외모 지상주의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아니, 못생겼다는 것도 아니라 예쁘다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된단 말일까? 


학창 시절, 나는 예쁘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다. 스스로 만족할 만큼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직장에 들어갔을 때, “이 팀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뽑나 봐”하는 농담을 듣거나, 오랜만에 만난 남자친구의 친구가 “이 자식, 왜 요즘 우리랑 안 노는 줄 알겠다.”라며 귀여운 빈정거림을 선사할 때 괜히 양 볼이 볼록하게 올라왔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여러 시련을 겪으면서 몸이 13kg 이상 불어났다. 설상가상 눈에 이상이 생기면서 화장을 할 수 없었고, 콘택트렌즈를 낄 수도 없었다. 당시 나의 시력은 6.5디옵터, 소위 말하면 마이너스 시력 중에서도 매우 나쁜 편에 속했다. 다섯 번 압축한 안경알도 내 눈을 1/2 크기로 줄여버렸다. 


불어난 몸무게, 노화가 드러난 민낯, 작은 눈. 거울을 보면 한숨이 나고 능력에 대한 자신감도 함께 증발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렇게 2년 정도 생활을 하다 보니 우울증 증세가 나타났다. 누군가에게 정이 떨어지면 밥 먹는 모습이 ‘처’ 먹는 모습으로 보인다 했다. 어느 순간 그랬다. 밥을 먹는 내 모습이 처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살겠다고 꾸역꾸역 먹는 내가 한심했다. 


사실 그때 나는 그렇게 추하지 않았다. 연예인으로 살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평범한 외모였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누구보다 추하고 뚱뚱하게 비추어졌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 기준을 높인 건 무엇이었을까?




외모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외모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다. 못생겼다, 추하다, 평가받아봤거나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적 인식으로 타인과 비교될 때 상처를 받는다. 나의 외모에 낮은 가치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쁘단 말을 들으면 행복해진다.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럼 아무 문제 없지 않은가?


나이 든 연예인이 달라진 얼굴로 등장할 때 시청자는 비난한다. 그만 좀 고쳐라, 성형중독인가, 예전이 훨씬 낫다. 당사자야말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남들 눈에 예쁘지 않은 모습이 자기 눈에 예쁠 리 없다. 다만 시청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들의 얼굴을 망친 건 수술이 아니라 세월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시술을 했지만 욕심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왜 이토록 외모에 집착하는 것일까?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한다. 인격은 성숙할지라도 외모는 갈수록 후퇴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젊을 때부터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아온 사람은 칭찬의 근본이 사라질수록 불안해진다. 그래서 더 외적인 요소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외모가 아닌 존재 자체로 사랑받았다면 어땠을까? 주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머리가 희끗해지는 자신의 노화마저도 수긍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람들은 좋은 말해주는 것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좋은 말에는 가치판단이 숨어 있다. 어떤 조건에 대한 칭찬은 그 조건을 인정해 준다. 하지만 그 조건이 사라졌을 때 너의 가치도 사라진다는 뜻이 내포된다. 다시 말해 칭찬도 결국은 평가가 되는 것이다.







칭찬의 허점은 외적인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드라마 <안나>에서는 바라는 일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삶을 훔치는 안나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똑똑하고 뭐든지 잘하던 안나를 떠올리던 담임 선생님은 그녀와의 기억을 회상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에 취약해요.”


잘한다, 똑똑하다. 칭찬에는 가치가 개입된다. 사람을 평가하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잘하는 순간에는 가치 있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사랑하지만, 늘 받던 칭찬을 받지 못할 때 자존감은 떨어진다.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생각하는 대신 인생의 걸림돌로 본다. 빈틈을 채우는 게 목적인 삶은 행복할 리 없다. 다시 말해, 우리의 칭찬은 누군가의 행복한 미래를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결혼을 결심하고 예비 시부모님과 식사를 하던 중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아들, 어디가 좋아요? 당황한 나는 순간 머뭇거렸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런 나의 태도가 민망했다. 예비 신랑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그때 어떤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야말로 나의 진심이었다.


결혼할 사람의 무언가가 마음에 든다면, 그 무언가가 사라질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얼굴이 잘생겨서 좋다면 나이가 들어 외모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돈이 많아서 좋다면 사업이 실패했을 때 관계도 실패할까? 선물을 자주 주는 것이 좋다면 선물이 끊겼을 때 사랑도 끊어질까? 다정한 말투가 좋다면 바쁜 일정으로 메시지가 짧아지는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다면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 사랑도 끝이 난다. 상대는 조건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고, 나는 조건을 남기고 있으라 아우성칠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행복할 리 없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타인을 대하는 마음의 기반에 ‘무조건적 존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조건적 존중은 그 사람이 문제를 가지고 있든, 잘못을 저질렀든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바라봐 주는 것이다. 무조건적 존중을 받은 내담자는 무언가를 해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새로운 도전을 격려하는 밑거름이 되고 부족함을 보완하는 용기가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재미난 사진 한 장을 봤다. 제목은 ‘웃긴 현수막 대회’였다. 커다란 두 나무 사이에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그 안에는 이런 내용이 인쇄되어 있었다. ‘축하합니다 김준호 –아무 이유 없음-’ 너무나 황당하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좋은 대학이 합격하지 않아도, 어느 대회에서 수상하지 않아도,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어도 김준호라는 이유만으로 축하받는 삶은 어떤 기분일까?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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