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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Jul 15. 2022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나요?

드라마 <안나> 속 공평한 세상 오류

 

지난 5월 서울의 한 공원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40대 남성이 60대 행인을 폭행한 것이다. 피해자는 영문도 모른 채 발길질을 당한 후 의식을 잃었다. 그런 행인의 주머니를 뒤져 오십만 원 정도의 돈을 훔친 가해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피해자의 머리를 연석에 내리쳐 숨지게 했다.




가해자는 그대로 공원을 빠져나와 또 다른 범행을 저질렀다. 폐지 줍는 80대 노인을 발견해 또다시 폭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폭행은 살인으로 번지지 않았고, 부상당한 노인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체포된 가해자는 조선족 사람으로 당시 마약에 취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많은 이가 분노했다. 첫 번째 분노는 당연히 가해자를 향했다. 하지만 또 다른 분노의 화살이 날아갔다. 공원을 지나가던 사람에게 말이다. 사건 당시 공원에는 많은 시민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범행 장면을 눈앞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개된 CCTV에서 폭행당한 행인을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송사에서는 그 자리를 지나던 시민 몇 명을 찾아내 물었다. 왜 보고도 지나치셨나요? 그들의 대답은 비슷했다. 이 동네에는 조선족이 많습니다. 그들은 원래 문제가 많지요. 자주 폭행을 저지르고요. 으레 일어나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맞은 사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다 싶었죠. 그들에게는 색안경이 쓰여 있었다. 편견이라는 색안경이다.


편견이란 어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대할 때, 한 사람의 개성을 간과하고 그 집단의 특성으로 뭉뚱그려 바라보는 것이다. 여자니까, 남자니까, 엄마니까, 늙은이니까, 어느 지역 사람이니까. 하고 말이다.      




공평한 세상 오류     

편견이 일어나는 원인은 다양하다. 그중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바로 ‘공평한 세상 오류, just-world fallacy’다. 우리는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는다. 얼마나 아름답고 정의로운 신념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이 신념에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또 다른 사람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두 사람이 공평하게 교육을 받고, 비슷한 노력으로 같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까?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 더 쉽게 보통의 것을 누린다. 우리는 이 보통의 것이 너무나 당연하여 공평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보통의 것을 누리지 못하는 이는 생각보다 많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있다고. 이를테면 시간이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하루에 24시간이라는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절대적인 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상대적으로도 같을까?     


한여름, 한 대학생이 부모님께 선물 받은 차를 몰고 학교에 간다. 20분 만에 도착한 그는 보송보송한 컨디션으로 도서관에 들어가 집중하여 공부하고 도서관이 문 닫는 새벽까지 공부한다. 한편, 차가 없는 다른 학생은 땀을 뻘뻘 흘리며 20분 동안 걸어 정류장에 도착한다. 정류장마다 서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려 학교에 도착한 후 처진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보낸다. 이제 집중이 좀 되려나 싶으면 막차 시간이 걸린다. 부리나케 차를 타러 가서 또다시 20분을 걸어야 집에 도착한다. 그렇게 녹초가 되면 그날의 여파가 다음날의 노력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두 사람은 과연 같은 시간을 선물로 받은 걸까?     



애초에 지능이 높게 태어난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쉽게 성취를 거머쥔다. 애초에 근사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같은 목표를 향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더한 노력을 들여야 한다.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인지부조화     

신념이 있다. 그런데 신념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럴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 가령, 담배는 해롭다고 믿지만 담배를 피우고 있다거나, 외도는 나쁘다고 믿지만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거나, 다이어트 중인데 눈치 없는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어서 배달 앱을 켜라고 아우성칠 때처럼 말이다. 이때 우리 가슴에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얹어놓은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든다. 이를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인지부조화는 우리를 힘겹게 한다. 그래서 빨리 해결해야 한다. 결단해야 한다. 신념을 바꾸거나 행동을 바꾸거나. 얼핏 생각하기에는 행동을 바꾸기가 쉬워 보인다. 하지만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연약한 의지력을 증명해 준다. 담배를 끊는 것, 좋아하는 사람을 잊는 것, 야식을 참는 것이 어려운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 상태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신념을 바꾸는 것.


비겁해 보일지언정, 신념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쉽다. 담배를 피우면서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높다고 어림없는 통계를 따지거나, 우리의 사랑은 특별하다고 내로남불의 태도를 품는 것이다. 일주일 내내 샐러드만 먹었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야식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며 나를 위로한다. 나의 행동을 지속해 줄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런 합리적이지 않은 합리화가 세상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게 한다.   

  

세상에는 혜택을 누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존재한다. 혜택을 누리는 자는 마음에 부채감이 쌓인다. 혜택을 나누어야 공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지만 내 것을 나누긴 싫으니까. 내가 더 많은 돈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부의 평등을 위해 나누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50의 빚을 지고 태어났고, 내가 100의 부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에게 조건 없이 75를 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와 나는 공평하게 25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런 셈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행동이 안 되면 신념을 바꾸면 된다. 희생의 대가를 치를 용기 대신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마련하면 된다.     


우리는 신념을 바꾸고 편견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당신에게 불행한 일이 찾아온 건 당신이 그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네가 성폭행을 당한 건 짧은 치마를 입어서야. 네가 사기를 당한 건 미리 알아보지 않은 멍청함 때문이지. 네가 가난한 건 나처럼, 나의 부모처럼 노력하지 않아서야. 나만큼 애써봐, 그럼 성공할 수 있어. 날 봐, 나는 불행하지 않잖아.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고, 너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원래 세상은 공평하거든.      


타인의 불행이 정당화되는 순간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편견의 시선으로 고스란히 물든다. 부당한 대우가 당연해지고,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되어주고, 또 다른 폭력이 되어 그들을 괴롭힌다. 마치 구로의 한 공원에서 이유 없이 생을 마감한 한 남성처럼 말이다.     






수지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드라마 <안나>는 가난한 양복집 사장 아버지와 청각장애 어머니 밑에서도 똑 부러지게 자란 유미가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돌변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를 비뚤어지게 한 첫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한 남자 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다른 교사들에게 들통나자 남자 교사는 그녀를 꽃뱀 취급한다. 결국 그녀는 도망치듯 학교를 옮기고 원하는 대학도 가지 못한다.      


설상가상 어머니는 치매,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는 끔찍한 상황에 치닫는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한 갤러리에 취직하게 된다. 유미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며 묵묵히 일을 완수한다. 그리고 딱 하루, 단 하루, 아픈 어머니를 보기 위해 휴가를 낼 수 있을지 묻는다. 그때 관장의 반응은 가관이다.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니들 문제가 뭔지 알아?
게으르고 멍청한데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려니까
그 모양인 거야! 평생을 그러고 살래?

    

이 비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있다. 먼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분노다. 어떤 사람이든 그렇듯이 관장도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직원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다. 여기서 직원이 잔말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그는 자신의 잘못을 눈치채지 못한다. 오히려 일자리를 준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 하지만 유미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나게 만든다. 휴가를 달라는 요구로, 거절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는 인지부조화로 인한 불쾌감을 공격적으로 드러낸다. 사실 유미에 대한 외침이 아닌, 자신을 향한 화라는 걸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두 번째로 그는 ‘니들’이라는 표현을 쓴다. 휴가를 달라고 한 것은 유미다. 하지만 유미가 아닌 ‘니들’ 그러니까 일하는 직원을 싸잡아 비난한다. 편견의 대상을 만든 것이다. 그가 가진 편견의 대상은 자신과 달리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게으르고 멍청한데 남들 하는 거 다 하려는’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하면서 자신과 다르게 사는 이유를 정당화한다.      





이렇게 보면 수혜자는 아주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나는 다르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부자, 독보적인 외모의 소유자, 상위 1%의 지능을 가진 천재나 남들을 무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선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은 우리 모두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모습은 나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이 제힘을 발휘하도록 기반이 된 조건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인 삶이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해서 별것도 아닌 것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조건일 수 있다. 매일 먹는 똑같은 반찬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인사할 수 있는 용기가, 매일 싸우는 부모 형제가, 모니터를 보고 있는 두 눈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때 걸어 내려갈 수 있는 두 다리가 말이다.     


우리는 특별한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수혜자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진 평범함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함이 된다. 그것이 바로 혜택이고 우리가 수혜자인 이유다. 보편적인 삶은 디폴트가 아니다. 타인과 비교해 나은 모든 것이 추가 옵션이다. 그 옵션을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시민들의 선행으로 세상이 다정해지는 기사를 종종 본다. 그 기사 속 사람과 구로 공원에 있던 사람은 과연 다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타인을 위하는 진심과 용기가 있다. 하지만 내가 색안경을 끼는 순간 그 마음은 세상에 나올 기회를 차단당한다. 세상이 공평하다는, 그러니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의 시선. 하지만 그 믿음은 왜곡된 잔인한 착각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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