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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바 Apr 22. 2024

나도 모르게 그 남자가 좋아졌다

그에게 빠져든 일주일의 시간

다이빙 슈트 입혀주는 남자


"강사님! 슈트가 조금 타이트해요. L사이즈로 바꿔주세요"

"슈트는 크게 입는 게 아니에요. 지금 입은 M사이즈가 맞아요"


처음 스쿠버다이빙 교육을 받을 때였다. 몸에 딱 달라붙는 다이빙 슈트가 어색했다. 내 뱃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몸매가 부끄러웠다. 슈트는 자신의 몸에 맞게 입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슈트를 입는 이유는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있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있다. 슈트 안에 물이 들어가면 체온으로 따뜻하게 물을 데워주는데 슈트가 크면 물을 데울 수가 없어서 체온 유지가 어렵다.


오전 8시. 여느 때와 같이 다이빙 샵에 왔다. 비키니 수영복 위에 슈트를 입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비키니 입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창피했다.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쪽 발을 넣고 슈트를 올렸다.


'뭐야! 왜 이렇게 안 들어가? 작은 건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손가락에 힘을 팍 주고 다시 슈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도 힘이 들어갔다. 바닥에 땀이 뚝뚝 떨어졌다. 허리를 펴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십 분 동안 슈트와 싸웠다. 손마디에는 살이 벗겨져서 피가 났다. 겨우 양쪽 무릎까지 입었다. 준 강사가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혼자 슈트 입기 힘들면 도와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거절했다. 혼자서 열심히 낑낑대며 슈트를 더 올렸다. 꼼짝도 안 한다. 다시 한번 그는 나에게 말했다.


"슈트 쉽게 입는 방법 있어요"


다른 교육생들도 나를 기다렸다. 시간을 더 끌 수 없었다. 슈트를 반도 못 입은 채 화장실 문을 열었다. 부끄러웠다.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는 나를 수돗가로 안내했다.


"손은 괜찮아요? 슈트는 고무 재질이라 처음에는 입기 어려울 수 있어요"


다친 손가락을 보았나 보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바가지에 물을 떠서 슈트 안에 물을 부었다. 올라가지 않았던 슈트는 단번에 허리까지 올릴 수 있었다. 그다음 팔을 넣어서 입어야 할 차례다.


"제 어깨 한 번 잡아주시겠어요?"


우리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그의 어깨에 올린 내 손. 팔 부분에 있는 슈트를 쭉쭉 올려 주었다. 집중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약간의 숨소리가 들렸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그 찰나에 후광이 비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소리도 들릴까 싶어 숨을 잠깐 멈췄다. 양쪽 팔을 다 입혀 주었다. 마지막으로 뒤에 있는 지퍼도 끝까지 올려 주었다. 혼자서 슈트를 입을 수 있을 때까지 매일 도와주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슈트가 대체 뭐라고 나를 설레게 만들어'


그 남자의 수줍은 고백


다합 라이트하우스 어느 한 레스토랑. 어드밴스 교육을 다 마치고 준 강사와 조금 가까워졌지만 말은 놓지 않았다. 피자 한 조각씩 나눠 먹었다. 고개를 돌려서 바다를 보았다. 오픈워터를 배우고 있는 교육생들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스쿠버다이빙을 포기했다고 말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나를 다이빙에 푹 빠지게 만들다니, 그가 다르게 보였다. 


"강사님은 어쩌다가 다합에 있는 거예요?"

"직장 생활이 답답해서 퇴사하고 뭐 할까 고민하다가 카이로에 어학연수로 왔어요"


"우와! 신기해요. 보통은 영어를 배우러 가잖아요. 근데 왜 지금은 다합에 있어요?"

"직장이 외국계 회사였는데 아랍어를 배우면 경쟁력이 있겠다 싶어서 카이로로 왔어요. 매일 똑같이 공부만 하다가 우연한 기회로 여행했어요. 친구들과 사막 투어도 하고 룩소르 신전도 보고 그러다가 다합까지 왔어요.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이빙 강사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사가 되기로 결심했죠. 헤바씨도 이제 다이버라서 알겠지만 스쿠버다이빙이 꽤 매력 있잖아요!"


아랍어와 스쿠버다이빙 강사. 반전 매력이랄까. 나도 모르게 그가 끌렸다.


그에게서 수줍은 고백을 듣게 되었다.


"강사님! 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고마워요. 사실은 헤바씨가 첫 학생이에요. 다이빙 포기 한다고 했을 때 그래서 더 안타까운 마음이었어요"


"와! 진짜요? 꼼꼼하게 알려줘서 전혀 몰랐어요. 첫 강사님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어요!"


그는 쑥스러워한다. 귀여웠다. 우리는 어색함에 피식 웃었다. 상대를 좋아할 때 귀여워 보이면 끝이라 했다. 나도 모르게 한 순간에 빠져들었다.


첫 강사와 첫 학생의 만남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남자의 보이지 않는 벽


멈출 수 없는 나의 짝사랑은 시작되었다. 준 강사는 게스트하우스 2층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1층으로 내려왔다. 공용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를 위해 따뜻한 차 한잔을 준비했다.


"사과 차가 맛있네요. 어디서 샀어요?"

"튀르키예 떠나기 전에 유명해서 샀어요"


그와 맛있는 것을 나눠 먹는 게 좋았고 마주 앉아서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튀르키예 여행은 어땠어요?"

"지중해가 멋있는 곳이에요. 기회 되면 꼭 한 번 가보세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맞다! 저 여기 지민(가명) 언니가 추천해 줘서 왔어요"

"지민? 아~ 기억나요. 여기서 다이빙하고 갔죠. 세상 참 좁네요"

"그렇죠? 튀르키예에서 만나서 같이 여행했어요"


말도 편하게 놓고 싶었고 가끔 장난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우리는 여행과 다이빙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은 궁금했던 말은 따로 있었다. 나는 짝사랑 징크스가 있다. 내가 먼저 짝사랑을 시작하면 나중에는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별거 아닌 질문도 조심스러웠다. 분위기를 살피고 용기 내어 질문했다.


"강사님은 여자친구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왜 안 사귀는 거예요?"

"안 사귀는 게 아니라 못 사귀는 게 아닐까요. 지금은 마음에 드는 여자도 없고 아무래도 다합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좀 어렵죠"


"아.... 그건 그렇죠"


더 이상 말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은 반가운 말이었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은 부정의 의미도 느껴졌다.


일단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방법을 고민했다.


엽서 한 장 마음 듬뿍


튀르키예 여행 마지막 날에 엽서 몇 장을 산 적이 있다. 다른 교육생들은 어드밴스 자격증까지 5일이 걸렸고 나는 7일이 걸렸다. 게스트하우스 공용 거실에 앉았다. 가장 예쁜 엽서를 골라서 펜을 들고 마음을 적었다.


TO. 멋진 준 강사님

저 일주일 동안 가르치느라 고생하셨어요.
이제 매일매일 바닷속에 들어가고 싶어요.
스쿠버다이빙 포기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이 무섭지 않았던 이유는 강사님의 격려 덕분이에요.

첫 강사라는 고백은 저에게 영광이었어요.
첫 학생인 저 절대로 잊으면 안 돼요.

우리 앞으로 더 잘 지내봐요. 다시 한번 감사해요.

FROM. 첫 학생 헤바


감사하다는 엽서 한 장이지만 사실은 사심 가득 담긴 엽서다.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일주일 동안 다이빙을 걸음마부터 아이처럼 하나하나 배우다 보니 어느 순간 그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다합의 여행지. 이곳에서 그에 대한 설렘과 알 수 없는 끌림은 나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사랑에 빠지기 충분했다.


다합 바다도 그 남자도 좋아졌다.


다이빙 슈트 무릎에는 고무가 있다.
다합 라이트하우스, 입수하고 그를 바라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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