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트라 Feb 20. 2024

낡은 외투를 벗어던지고 산티아고로 가자

기꺼이 선택한 상실과 자유에 대하여

이혼한 지 1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브런치엔

눈에 띄게 이혼에 대한 글이 많이 연재되는 듯하다.


굳이 나까지 나의 이혼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을까 싶기도 하지만 용기 내어 써본다.




이제와 들끓던 마음을 한 김 식혀놓고 들여다보니

결혼도 이혼도 결국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결혼은 내가 행복하고자 선택한 길이었고

이혼은 내가 존엄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나의 글을 보는 사람들이

부디 사랑을 경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많이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담아 매주 화요일 연재한다.








없는 집 장녀로 태어나서 결혼은 나와 상관없는 일,

개룡녀를 꿈꾸며 참으로 악착같이 살았다.

30대에 접어들고 일과 삶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느껴질 때즈음, 지인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나보다 4살이 어렸던 그 남자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 모임에서 원치 않게 주목받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의 재치로 나는 그 상황을 스무스하게 모면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대시는 대단했다.

번호를 교환한 다음날 그에게 전화가 왔을 때, 내 화면에 뜬 이름은 다름 아닌 ‘남자친구'였다.

만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서부터 내게 결혼을 하자며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같이 졸라댔다.

나는 황당해서 "아니 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한 네가 무슨 수로 결혼을 하냐"는 나의 물음에

“내가 누나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하겠느냐"며 호탕하게 큰 소리를 치던 그였다.


사실 가볍게 시작한 만남이었지만, 그의 당참과 순수함에 어느샌가 마음이 동화되었고,

그다음 해 그와 나는 혼인신고를 하고 살림을 먼저 합쳤으며 이듬해 5월,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나를 먹여 살리지 못했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근무하던 학원을 무리해서 인수를 했고, 결혼 생활 내내 수입이랄 게 없었다.

여기까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재정 상황이 무척 심각했다.

신용에 문제가 있었던 전 시어머니가 아들의 명의로 모든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사용하던 신용카드도, 타고 다니던 자동차 리스도 모두 전 남편의 명의였고, 심지어 결혼 직전 사업자금을 명목으로 남편에게 큰 금액의 대출을 받게 했던 것이다.


결혼 전엔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전 시어머님은 누가 봐도 굉장히 세련되고 우아하신 분이었다. 30년째 사업을 운영하고, 취득한 학점만 300점이라고 하실 만큼 끊임없이 배우고, 전문적인 강의와 상담을 하시는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관리를 위해 하는 노력은 연예인 저리 가라였고, 골프와 피아노, 뮤지컬까지 즐기는 취미도 다양하셨다. 주변 사람들을 어찌나 살뜰히 챙기시는지 살고 계시던 이층 집엔 손님이 자주 오셨었다. 누가 봐도 경제적으로 부족함은커녕 여유롭게 느껴지는 집이어서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결혼 전까지는 그 빚들을 어머니께서 잘 갚았던 터라 문제가 되지 않았었는데, 결혼 후 코로나가 터지고 하던 일들이 잘 되지 않으며 상환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는 내게 상처주기 싫다는 이유로,

모든 문제들을 내가 아닌 자신의 엄마와 해결하려고 들었다.


우리 엄마가 알아서 잘 갚을 것이니

우리 둘은 원래처럼 잘 지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별개로 그 빚은 고스란히 그와 나에게 돌아왔고, 그는 수입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결혼 후 6개월도 되지 않아 완벽한 가장이 되었다.

다행히 당시 절박함에서 시작된 나의 사업은 단시간 내에 성장했고, 사이에 일어난 경제적 위기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해결되었다.


근데 돌이켜보니 문제는 거기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는 내게 이상한 자격지심을 느끼면서도,

가정을 위한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지지와 우리 엄마의 도움을 조금 받아

3년간 하고 싶은 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나는 그가 부디 자신의 비전을 찾는 것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기를 바랐다.


대신 아이계획이든 무엇이든 다음 단계를 고려했을 때,

3년의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다고 느껴지면

가정을 위해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보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돈을 벌어오라는 바가지를 긁어본 적이 없다.


그는 나의 헌신과 노력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가 매우 다정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내겐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널 위해 모든 걸 다한다 말하면서도

나를 최전방 절벽 끝으로 점점 밀어 넣고 있는 것 또한 그였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와의 미래가 점점 더 그려지지 않았고, 나는 극심한 공허함과 정서적 외로움에 시달렸다. 홀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에게 말했던 3년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일을 정리했다.

그러나 새로운 일은 찾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별다른 방도가 없으니,

나는 나와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하루 6시간 이내 , 주 5일 재택근무.

나머지 시간에 미래를 위한 배움과 관리를 하자고,

나는 나의 부모에게도 받지 못했던 지원을 남편에게 해주었다. 그가 부디 내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는 아주 작은 일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수동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A부터 Z까지 모두 알려달라 했고, A부터 Z까지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근무시간이 끝나면 넷플릭스에 맥주를 마시기 바빴다.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말은 줄었다.


분명 나도 남편으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는 결혼생활을 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다.



함께 일을 시작한 첫 주 주말, 시어머니 생신.

그는 지난 4일간 일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대학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갔다.

그리고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단둘이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두 아들 모두 자신의 생일을 챙기지 않는데, 함께해주는 내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주 주말.

전 남편은 갑자기 동창들과 근처에서 외박을 하며 술을 마시겠다고 했다. 그 중엔, 그와 내 사이에 지속적으로 트러블을 만드는 여성편력이 심한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네가 정 친구들과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내가 친정에 가있을테니 우리집에서 편히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사실 거짓말을 했다며

멀리 바다여행을 가기로 했기 때문에 본인은 1박 2일 외박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일요일에 중요한 외부행사가 있어서 아침부터 함께하기로 했고,

남은 업무들이 꽤나 많아 주말엔 일하기로 했는데 말이다.


나는 그에게 미친 거 아니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와 살며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이렇게 일만 하며 살기 싫다고 했다.

고작 십일 같이 일했는데...?


심지어 본격적으로 함께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동안 학원에 매여있느라 못한 해외여행도 두차례,

자신을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

제대로 손주노릇 해본적 없다고 슬퍼하기에,

3주전엔 시조부모님에 시부모님 시동생까지 모시고

강원도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도대체 ‘이렇게‘ 말고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질 않았다.

그리고 덧붙이길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업무는

사실 자신과 안맞고 보람도 재미도 없다면서.

자긴 때 되면 신상옷도 사서 입고,

친구들 만나서 술도 마시고, 놀러도 가고..

뭐 그런 재밌고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기가 막혀 물었다.

자기 몫을 하지 않고 어떻게

그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지,

너는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도대체 너에게 내 인생은 무엇이냐고

지금까지 그런 사고방식으로

내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살아온 거냐고

내가 너의 빚을 갚고, 네 부모를 대신해서 너를 키우려고 결혼을 한 거냐며 울부짖으며 말했다.


그는 가족인데 그 정도의 희생은 할 수 있는거라며

자기가 돈만 있었으면 너처럼 아까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가빠져왔다.

이러다간 숨통이 막혀 정말 죽어버릴 것 같아서

가슴과 허벅지를 주먹으로 치며

말 그대로 미친년처럼 꺽꺽대고 울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자학하는

자신의 아내를 버려두고 결국 친구들과 1박 2일 바다로 놀러갔다.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무능함도 그의 뻔뻔함도 아니었다.


얼마를 벌든, 심지어 돈을 벌든 그렇지 않든

나는 그와 내가 ‘우리의 가정’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다고 믿었다.

그 희망만이 내가 기꺼이 헌신하며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나 혼자의 몫이었던 것이다.


이 가정을 지키기 위한 기여.

그 기여에 대한 기준과 감각이 다르다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바뀔 수 없고,

바뀐다고 한들 내겐 더이상 그를 믿고 기다릴수 있는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두번을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인스타그램 피드엔 그와 그의 친구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얼큰하게 취해서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밤새도록 울다보니 날이 밝았다.

눈이 펑펑 내렸다.

나는 일을 하러 가야했다.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르게 가까스로 일정을 마치고집에 돌아오니 그가 일을 한다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기가 찼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자. 이 집에서 먼저 나가줬으면 좋겠어. “


“여기가 내 집인데, 내가 어딜 나가?”


“이게 네 집이라고 말하는 거..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 안 해? 나 너랑 언쟁할 생각 전혀 없어.

나는 너랑 더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거든. 다만 너희 집에선 우리 상황에 대해 모두 알고있지만, 우리 집에선 내가 이렇게 사는 거 모르잖아..

내가 우리 가족들에게 말할 수 있는 시간, 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좀 줘. 나 운전도 못하고 갈 데도 없어.“


그러자 그는 순순히 자신의 옷을 챙겼고,

2km 거리에 살고 계시던 시어머니는 아들의 연락에 초스피드로 집 앞까지 그를 데리러 왔다.

그날 밤, 시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부부상담을 해줄테니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쥐고있던 핸드폰을 침대에 집어던져버렸다.


그렇게 이혼을 했다.

시시하게.


.

.


마지막까지 신혼집에 머문 것은 나였다.

내가 한 달 반에 걸쳐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알뜰살뜰 처분하는 사이

그는 늘 그랬듯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모든 상황을 수동적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 집을 나가자마자 3일만에 그는 일을 구했다.

어떻게 일을 구하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나도 살아야지.”



이혼을 안 하겠다고 버틸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이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의 엄마가 친절하게도 부동산에 집을 내놓아주셨고,

심지어 이혼합의서도 친히 작성해 주셨다.


몇 년을 함께 산 남자가

이리도 마마보이였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나.

이렇게 어린 남자를 무슨 생각으로 믿고 결혼을 했을까.

나는 내가 꼭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헛똑똑이 같았다.




나는 그 겨울, 스스로를 꾸짖으며 고립을 자처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홀로 5시간 이상씩 걸었다.

각성된 새벽은 그야말로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몸이라도 피로해야 그나마 밤에 잠을 잘 수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산책로도 제대로 없는 그 외곽 동네를,

허름하고 낡은 외투를 입고 매일매일 걸었다.




/


대학교를 막 졸업하던 무렵,

직구로 저렴하게 구입한 검은색 패딩이었다.


가격이 싸서 산 옷이었는데

처음 한 두 해는 옷 자체를 잘 입질 않았고

(당시 나는 원피스와 코트의 조합을 좋아했다)


그다음엔 "1~2년만 입고 제대로 된 명품 패딩을 사는 거야!" 하며 마지못해 입었고,

그 후엔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고, 소비 패턴이 바뀌며 계속 입게 되었다.


하나 새로 살까 싶던 찰나에 코로나가 터지며

겨울에도 실내에만 있는 생활을 했던 터라

새 옷을 살 이유를 못 느껴서

얼떨결에 계속 입게 된 외투였다.


심심한 사연이 많은 이 허름한 외투를 입고,

울며 겨자 먹기로 운전연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 막 초보딱지를 붙인 채,

실내 세차를 맡기러 갔는데

세차장 주인은 차에 광택을 내야 한다며

32만 원짜리 가장 비싼 세차를 할 것을 내게 권유했다.

예상치 못한 비용에 내가 고민하자 그 주인은 말했다.


"차도 오래되면 당연히 변색되죠.

고객님 입고 계신 외투도 처음엔 이렇지 않았을 거 아녜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아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색이 바래고 낡았구나...'

그에겐 좋은 것만 주려던 내가 입고 나갈 옷이라곤 이것뿐이라는 게 참 웃겼다.

하기사 집을 나갈 때도 옷부터 싹 다 챙기던 사람이었다.



세차된 차를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사실 세차장 주인의 말은 내게 전혀 타격감이 없었고,

32만 원을 받아놓곤 4만 5천 원짜리 서비스를 한 그 부당함에 진짜 화가 났다.


하지만 허술하게 세차가 되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고, 따져 묻기엔 내겐 그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문득 지난 결혼 생활이 떠오르며,

당시 나의 부주의함을 지금의 내가 감당하는 것이라고 탓했다.

그리고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을 겪고 싶지 않거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스스로에게 경고하며 넘겼다.


/

 




물론 그 후로도 여전히 나는

그 색이 바래고 낡은 외투를 입고 계속 걸었다.

그 겨울은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봄이 오면 이 외투를 벗어던지고 새 삶을 시작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니 이 외투를 입고 있는 동안만큼은 많이 울고 많이 슬퍼하자고,

수많은 형태의 괴로움들을 여기에 모두 담은 후, 기꺼이 버려버리자고.





이사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 모든 기억을 담은 낡은 외투를 종량제 봉투에 꾸역꾸역 욱여넣은 뒤 매듭을 꽉 묶었다.



이별이 슬퍼서 일도 삶도 미뤄둔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20대의 어느 겨울날이 떠오르기도 했고

새벽 내내 그와 사네마네, 죽네사네 피 터지게 소리치고 싸우다가도

해가 떠오르면 눈물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평온한 얼굴로 요가수업을 진행하던 얼마 전 겨울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서로의 탓을 하며 욕을 하던 그 입에서 감사와 사랑 따위의 단어가 나왔다.

그 가증스러움과 상황들이 구역질 날만큼 싫었지만, 사실 거짓은 아니었다.

탓을 하던 마음도 진심이었고, 사랑을 말하던 마음도 진심이었으니까.




 엄마는 내 이혼 소식에 많이 마음 아파하셨지만,

마지막 집정리를 도와주고 싶다며 찾아오셨다.

먼지 한 톨 없도록 쓸고 닦고 바닥까지 걸레로 박박 닦았다.


마지막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을 나서는데,

엄마가 갑자기 집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OO아! 그래, 네가 어리니 뭘 잘 몰랐겠지.

열심히 살거라! 기왕이면 잘 살거라! 우리 딸도 잘 살 거니까!"


나도 고개를 푹 숙이며 속으로 인사를 했다.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어 고맙다고.



마지막으로 들고 나온 쓰레기는 외투였다.

가벼웠지만 두 팔로 꽉 끌어안고 나와 쓰레기통에 정성스럽게 집어넣었다.

이사하던 날, 가장 마지막으로 버린 쓰레기였다.








2023년 3월 어느 날 아침,

새로운 동네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두꺼운 외투가 필요 없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긴 호흡으로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전에 살던 동네보다 여러모로 나은 동네였다.


그리곤 앞으로 살아가며 어디를 거치고 어디에 뿌리내릴지 모르겠지만,

주거지를 결정하는 요소로 반드시 긴-산책로의 여부를 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출처 Pinterest


그날 오후에,

우연히 산티아고 순례길 영상을 보게 되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분명 이전에는 그리 가고 싶던 곳이 아니었다.

순례길과 인도는 그곳이 부르는 때가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이 그때구나 직감했을 뿐.


몇 시간 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를 수 있는 항공권을 바로 티켓팅했다.

오래 고민할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그 후 여유 있게 시간을 두어,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나는 상상하며 계속 걸었다.

그 길을 걸으며 나의 모든 면, 아주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강렬하게 직면하기를.

기꺼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상실과 자유를 진하게 느낄 수 있기를.


그 길의 끝에 내가 무엇을 얻을지 혹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모든 흐름을 고스란히 수용하며 통과할 수 있기를.



그런 소망을 안고 2023년 5월 25일 내 36번째 생일.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