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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트라 Mar 12. 2024

70대 파리지앵 할머니의 인생조언

킥보드를 신나게 타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파리에서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은

카를라 브루니의 <The winner takes it all>이었다.


I don't want to talk
About things we've gone through
Though it's hurting me
Now it's history
I've played all my cards
And that's what you've done too
Nothing more to say.
No more ace to play...



아침 6시가 되자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것이 조용하다.

나는 세수와 양치를 하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 곳에 여행을 가도

아침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제의 그 화려했던 파리의 밤이 언제였냐는 듯,

차분한 아침공기만이 남아있다.

가볍게 도시를 달리는 러너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제 막 태양이 뜨는 파리의 아침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아침 출사 겸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할머니가 일어나 계셨다.


할머니는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커피를 한가득 내리고, 토스트 한 조각과 요거트를 내어주셨다.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내게 건네며

여기에 버터를 얹어 먹어보라고 하셨다.

꿀에 절인 작은 파운드케이크 같은 것이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단 음식을 먹고 싶진 않았지만,

할머니의 권유에 하나 먹어봤는데

글쎄, 계속 손이 갔다.

특히 진한 커피와는 정말 찰떡궁합이었다.

(이것을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찾아 헤맸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오늘은 무얼 할 예정이니?"


- 오늘은 요가하러 가려고요. 그다음은 음... 파리에 왔으니 에펠은 보고 와야겠죠? 사실 큰 계획이 없어요.


"그래 에펠 좋지. 보고 오렴. 요가하러 어디로 가니?


- 이 근처에 가까운 요가스튜디오가 있어요. 그래서 오전에는 그곳에 가고요, 오후에는 8구에 위치한 스튜디오에 가보려고요.


"두 군데나? 대단하네."


- 전 여행 오면 보통 요가하고, 공원 산책하고, 로컬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해요.

쇼핑보단 그 동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즐겁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많이 걸으면서 둘러봐요.


"그럼, 나는 네가 좋은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대부분 파리에 오면 다들 미식과 쇼핑하기 바쁘거든.

특히 여기 바로 앞이 라파예트 백화점이잖아?

그 이유 때문에 우리 집에 묵는 사람들도 꽤 있어."


이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씀하신다.

"특히 중국 여자들은 백화점에서 명품을 바리바리 사들고 오거든.

그리곤 포장 박스를 여기에 한가득 버리고 떠나려고 해.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붙들고 실랑이를 하지.

그럼 자신들이 비용을 지불했으니 그만한 권리가 있다고 소리쳐.

그럼 나는 이야기해, 여긴 호텔이 아니니 매너를 지키라고. 행동에 책임을 지라고."


나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상황을 천천히 그려본다.

왠지 모르게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 마음이다.


"그들의 여행 목적은 오로지 쇼핑인 거야.

온갖 화장품과 명품, 사치품.

그것들을 사기 위해 파리에 오지.

역사와 문화,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어.

요즘 사람들은 360도 서라운드로 타인을 의식해.

모두가 다 자신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

그러니까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더 좋은 것, 더 화려한 것, 더 비싼 것이 필요한 거야. 그게 바로 에고(Ego)인 거고, 난 그게 요즘 사회의 큰 문제라고 봐. “


- 공감해요. 저도 매일 에고를 버리려고 다짐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잘 되진 않지만요.

그게 제겐 요가를 하는 목적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럼, 당연해.

자기 자신에게 확고한 사람은 그런 것은 필요 없어."


- 요즘은 인생이 조금은 재밌게 느껴져요. 이전엔 타인을 의식해서인지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들고 슬펐거든요.

일, 공부, 음악, 사랑, 결혼생활까지도, 어느 것 하나 내 맘 같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불확실하고 내 맘 같지 않은 것이 인생의 기본값이라고 생각하니, 좀 재밌고 기대돼요.

그저 인생을 파도 타는 서퍼처럼 잘 흘러가고 싶은 바람이에요. “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한다.

(할머니는 굉장히 감정 표현에 충실하고 호탕하며, 뒤끝이 없다.)


"요가를 해서일까? 너에겐 뭔가 단단한 내공이 느껴져."


이어서 말씀하신다.

"펜데믹으로 모든 게 멈췄을 때, 뭘 배웠니?"


-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요.


“그렇지. 나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팬데믹 때 이곳에 락다운이 내려지고, 이 아파트에 갇히면서 모두가 얼마나 당황하고 답답했는지 몰라.

그런데 어느 날, 같은 층에서 악기 소리가 들리더라.

그리고 다음 날은 누군가 노래를 하고 말이야.

가만히 그 음악들을 듣고 있으니 좋았어.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더라고.

나는 그 고립과 외로움을 이웃들 덕분에, 그 음악들 덕분에 행복하게 지나갈 수 있었어. “


삶에서 예술, 미식 등 온갖 아름다움을 위한 것.

그래 다 좋지.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관계란다.

결국 사람 간의 연결만이 삶의 의미를 준다는 거야.

우린 그걸 자주 잊지만 자꾸 기억해야 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관계라는 것을."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

할머니는 이어서 묻는다.


"그럼 너는 팬데믹 때, 어떻게 요가를 했니?"


-저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고, 혼자 집에서 수련했어요.


"오 그렇구나, 나는 복도를 왔다 갔다 걷고 또 킥보드를 탔어."


-킥보드요?


"그래 킥보드! 나 킥보드 있거든. 보여줄까? 복도로 나와봐."




할머니는 복도에서 힘차게 킥보드 바퀴를 굴렸다.

나는 정신없이 웃었다.


"너도 타봐! 재밌어!"


-ㅋㅋㅋ 저는 안 탈래요ㅋㅋ


"후회할걸? 원하면 언제든지 말해. 내 킥보드 빌려줄 테니."




시간을 보니 어느새 오전 10시가 넘었다.

장장 3시간을 가까이 할머니와 떠든 것이다.

가려던 요가수업은 갈 수가 없게 되었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할머니에게 보물 같은 이야기들을 들었으니까.




오후에 가려던 요가 스튜디오를 찾아갔고, 키가 큰 프렌치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그리곤 나와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뭘 할지 고민하다가 일찍이 에펠에 갔다.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을 해야 빠르게 에펠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는 듯했다.

고민하다가 그냥 사람들이 많은 곳에 줄을 섰다.


생각보다 줄은 빠르게 빠지지 않았다.

30분,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조금 더 기다렸다.

그 무렵 이미 많은 사람이 포기를 하고 돌아갔다.


1시간. 입구가 가까워진 것이 보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여기에서도 꽤 많은 이들이 돌아섰다.


1시간 30분.

입구로 보이는 건물 앞까지 들어섰다.

바로 에펠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당황스럽게도 거기서부터 또 내부에 줄이 있었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1년, 아니겠지.

2년, 변하겠지.

3년. 안 되겠다.

지난 결혼생활에서 느낀 일부의 감정들.

부정, 신뢰, 단념.


나는 빠르게 돌아섰다.

모를 땐 몰라도 알고 나면 빠르게 선택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안다는 듯.

거기에서부턴 아무도 포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서는 나를 보고 내 앞뒤로 서있던 사람들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왜 이렇게 미련할까!'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에펠 밖을 빠져나가다가 다시 돌아섰다.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운 에펠이었다.

나는 에펠이 잘 보이는 공원에 앉아서 글을 썼다.

굳이 내부에 올라가 보지 않아도 충만한 시간이었다.



에펠을 뒤로하며 걸어오는 길,

이 아름다운 장면을 혼자 봐야 하는 것은 어쩐지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집까지 천천히 걸어오며,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와인 한 병과 납작 복숭아 3개, 문어세비체와 1리터짜리 미네랄워터.

플라스틱 보틀에 담긴 미네랄워터는 할머니 눈치를 보느라고 가방 속에 쏙 숨겨두었다.

오늘 아침 정수기를 찾다가 탭워터를 먹으라며 혼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석회물을 먹는 것은 영 내키지가 않는다.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TV를 보고 계셨다.

나폴레옹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할머니에게 저녁식사 여부에 대해 물었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거지감을 보니 파스타를 해서 드신 모양이다.


- 저 와인을 한 병 사 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좋지"

그리곤 내게 와인 오프너를 건네주셨다.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오프너여서

내가 허둥지둥거리자

할머니는 그런 나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코르크를 더 잡아당기면 부서질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도와달라는 의미로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소녀처럼 웃으며 말씀하신다.

"와인은 여자가 따는 게 아니야,

프랑스 여자들은 와인을 먼저 열지 않아."


그러면서 내게서 와인병을 도로 가져가

‘잘 보고 배우렴’이라는 듯 오프너 사용법을 보여주시고

아슬하게 걸쳐진 코르크를 내게 건네며 말씀하신다.

"자 이제 네가 해봐"





할머니는 좋은 와인을 잘 골라왔다며,

오늘 요가는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오전 수업을 놓쳤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불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치껏 잘 따라갔다고, 즐거웠다고 대답했다.


대화 중간중간에 내가 영어가 턱턱 막힐 때면,

"잠시만요" 하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찾아 이야기하곤 했는데, 할머니는 그런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언어를 구글로 찾지 마. 그렇게 하면 기억 못 해.

네가 요가하듯이 마음을 열고 듣고,

어설프더라도 내뱉으며 말해. 괜찮아, 다 느껴지니까. 모두가 다 당연히 겪는 일이야."



편안해졌다.

할머니 앞에서는 어수룩하고 엉망진창으로

영어를 내뱉어도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욱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어제 튈르리 가든에서 만난 이상형의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다.


"그래서? 그다음은?"


-네? 전 그냥 가던 길 갔죠?


그러자 할머니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왜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니?"

 

- 그럴 생각 없었어요. 말도 안 통할테고..


"아니! 이상형을 보면 당당하게 말을 걸어야지!

내가 첫 파트너 만난 이야기를 해줄까?"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람을 학교에서 만났어. 우린 독일의 같은 학교를 다녔고, 학교 파티에서 그를 처음 만났지.

일본 남자였는데 멀리서부터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먼저 말은 걸지 않고, 계속 쳐다만 보더라고.

나는 그 눈빛을 느끼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나는 그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일본에서 왔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바로 내게 어디서 왔냐고 되물어보더라?

그래서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 줄 알아?"


할머니는 마치 그때를 재연하듯

갑자기 테이블에 한 팔을 얹고 턱을 괴더니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리고 목 뒤로 머리카락을 샤-락 넘기면서

치명적인 미소를 띠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fr~~~~ ance"


할머니랑 나는 동시에 배꼽 빠지게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그와 나는 사랑에 빠졌고, 첫 딸을 낳았지.

그러니 너도 이상형을 만나면 당당하게 말을 걸어!

한번 나를 따라 해 봐! fr~~~~~~ance~~~~"


나는 할머니의 적극적인 지도편달 아래

“프롬 코리아~"를 여러 번 반복했다. 섹시한 눈빛과 제스처와 함께.


젊은 시절 할머니의 말간 얼굴을 상상이 됐다.

할머니에게도 앳되고 반짝이던 때가 있었고,

불같이 뜨거웠던 사랑이 여러 번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연거푸 담배를 말고 피우며,

당신의 지난 결혼생활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다 나는 할머니에게 대뜸 물었다.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머니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내게 말한다.

"내가 70살이 넘었지? 자연스레 호르몬도 변화했고.. 솔직히 나는 지금의 내가 그냥 동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더 이상 로맨스는 없달까?

종종 다양한 국적의 남자들이 이곳에 와.

웃기게도 예술하는 프랑스 여자와 단 둘이 사용하는 에어비앤비 환상을 가지고 오는 거야.

내가 70대인데도 불구하고!"


"흐엑~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럼~ 예전에 한 번은 아일랜드 남자가

샤워 후에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밖으로 나와선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라고.

하지만 나는 그가 바라는 어떤 에로스적인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거든.

나이가 많이 들었나 봐~ 그래서 웃으며 나는 그에게 부디 진정하고, 너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잠깐의 침묵을 갖고 바로 이야기한다.

"있잖아. 내가 남자에 대한 비밀 하나 알려줄까?"


- 뭔데요?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은

다 똑같다는 거야, 국적불문하고!!!"

하며 깔깔깔깔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내일은 뭘 할 거니?"


-내일은 이제 진짜 까미노 갈 준비를 해야 해요.

옷을 너무 안 들고 와서 원피스를 하나 사야 할 듯해요.

그곳에서 걷고 난 후에 샤워하고 입을 옷이 하나 있어야 할 것 같거든요.


"오 그래? 그럼 같이 갈까?

내가 이 근처에 저렴하게 옷을 파는 곳을 알아.

지금 내가 입은 이 카디건도 캐시미어 함량이 높은데 거기에서 엄청 저렴하게 샀거든."


- 좋아요! 내일 시간 되세요? 그럼 같이 가요!





다음 날, 나는 할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할머니는 예쁜 파란색 카디건에 청바지를 입고 앞장섰다.

눈부신 태양 아래 할머니의 백발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70대라고 하기엔 여전히 생기 있었다.


할머니는 날씨를 느끼며 내게 말한다.

"음~ 이 태양과 바람~ 너무 좋지~"


빠르게 걷던 할머니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더니,

앞에 있던 Lindor 초콜릿 매장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그리곤 시식용 초콜릿을 하나 쏙 먹더니 눈치를 보며 다시 나를 끌고 나온다.

할머니의 산책 루틴이라고 했다.

나는 생각한다.

국적불문 할머니들은 공짜와 저렴한 것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할머니가 추천하는 옷가게를 갔다.

이월상품들을 모아놓고 저렴하게 판매하는 곳이었다.

저렴했지만, 어느 하나 살만한 것을 고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쉴 새 없이 내게 입어보라며 원피스를 가져다준다.


하나같이 다 파격적인 옷들이다.

치마가 허벅지까지 깊게 트여있다거나, 가슴이 많이 파였다거나.

까미노가 아니라 당장 디너파티에 가야 할 만한 옷들이다.

나는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몇 벌 입어보다가 결심한다.


여전히 내 옷을 고르고 계시던 할머니 뒤로 가서 조용히 말한다.

"저.. 아무래도 여기서는 옷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까미노에 가서 한번 찾아볼게요."


할머니는 뒤돌아서 나를 보고 말한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이건 어떠니? 흐흐흐"


할머니 손에 들려있는 건 다름 아닌 호피 핫팬츠였다.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할머니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Paris Sexy~~~"라며 배시시 웃는다.


나는 너무 웃겨서 눈물을 흘리며 웃는다.

그러자 할머니는 말한다.


"까미노를 섹시하게 걷는 거야!

거기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날 줄 누가 아니?"


할머니와 즐거운 아이쇼핑을 하고,

leftover 피자 한판을 포장해서

파리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집으로 걸어간다.


집에 거의 다 와갈 무렵,

백화점 앞에 큰 보라색 아크릴판 2개가 버려져있다.

할머니는 바로 그 아크릴판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그것들을 요모조모 살펴본다.


"이 멀쩡한 걸 이렇게 버려놓다니. 이거 참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는데."

그리곤 뒤돌아 나를 보며 씩 웃는다.

마치 “준비됐어?”라고 묻는 것처럼.


나는 “못 말리겠네요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옮긴 아크릴판, 복도에 두기만 해도 사실 좀 예뻤다.



할머니는 어찌나 힘이 센지 두 손으로

아크릴판을 야무지게 잡고 집까지 앞장선다.

나 역시 왼팔에 피자봉투를 걸고

양손으로 아크릴판을 잡고 할머니를 따라간다.


집까지는 500m가 채 되지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아크릴판은

오래된 파리의 작은 엘리베이터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아크릴판을 들고 4층까지

계단으로 끙끙거리며 올라가야 했다.


집 앞에 그것들을 내려놓자

창 밖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더 오묘한 빛깔을 내며 아름답게 보인다. 할머니는 연달아 “아주 멋진 것을 구해왔어.” 라며 흐뭇해한다.


그러면 집에 있는 많은 작품들이

다 길가에 버려진 것들을 주워서 만든 것들이라며

내게 하나씩 알려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할머니가 대단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했다.

나도 할머니 나이가 되면,

일에 대해 저런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어제 남은 와인 한잔씩을 마시며 인사를 나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까.


할머니는 내게 말했다.

"수많은 게스트를 만났지만, 너는 좀 특별해.

까미노에 가면 어떻게 걷고 있는지 메일을 좀 주렴. “

나는 네가 좀 그리울 것 같거든.

그리고 다음에 파리에 온다면

아마 저 아크릴판은 멋진 작품이 되어있을 거야.

기대하고 꼭 놀러 와."


- 저도 한국에 돌아가면 이 시간이

파리에서의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건강하게 까미노를 걷고, 또 즐겨!

그리고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힘껏 사랑해.

너는 똑똑하니까 진짜 사랑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 고마워요. 저도 제가 그러길 바라요.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집을 나섰고,

할머니는 나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주었다.


아마 나는 인생이 심각해질 때마다 떠올릴 것이다.

복도에서 힘껏 킥보드 바퀴를 굴리는, 이 귀엽고 유쾌한 70대 할머니를!




Paris Sexy~




자 이제 시작한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


The winner takes it all.

and I think love is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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