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라Lee May 06. 2024

엄마를 위한 보양식도 필요하잖아요.

전복죽 한 끼의 의미

아이를 학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니 날씨가 너무 좋길래 근처 대형서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점에 앉아 읽던 책을 마무리하고, 읽고 싶어 찜해뒀던 신간들도 구경할 겸해서 말이다. 


, 근데 속이 출출하네. 3-4일 전 먹고 남았던 김치찌개와 밥솥에 남아있던, 한공기도 채 안 되는 밥을 오전 9시경에 먹고 오후 4시가 넘도록 쭈욱 굶었으니 배고플 만도 하네. 뭘 간단히 먹으면 좋을까 두리번거리는데 죽집이 눈에 띈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죽이나 먹으러 가볼까.

 

죽집 안으로 들어가려니 왠지 좀 머쓱하다. 주방 아주머니가 두 다리를 다른 의자에 올리시고 등은 벽에 기댄 채 구석에서 단잠을 주무신다. 홀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고 카운터에 아주머니 한 분이 무료해 보이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 계신다. 장소가 널찍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썰렁한 분위기에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입구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색함보다도 죽을 먹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뭉개 뭉개 피어오르니 이를 어쩐. 에라 모르겠다. 그냥 먹자, 먹어.


입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고른다. 내가 좋아하는 전복죽이 눈에 들어온다. 헉, 근데 전복죽이 28,500원이나 해? 아아, '진품'전복죽. 을 아래로 더 스크롤하니 완도전복죽 14,500원이 보인다. 그래, 저 정도는 먹자고. 비싼 메뉴를 보니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진다. 이게 이 집의 상술인가, 아니면 진품 전복죽을 못 먹는 백수 주부의 주머니사정이 구슬픈 것인가. 주문을 하고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아줌마가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신다. 가보니 우리 가게는 선불이란다. 후다닥 결제를 마치고 15분 정도 기다렸을까. 솥 안에 자리한 전복죽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구나. 꿀꺽. 침이 절로 입안 가득 고인다.


입 가득 죽을 넣으니 쫄깃한 전복과 고소한 참기름, 부드럽게 잘 풀어진 밥알이 한데 어우러져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새 없이 죽을 퍼다가 입으로 나른다. 더 빨리 옮기거라, 어서! 어릴 때 친구들이 볼이 터지도록 한 입 가득  밥과 반찬을 넣고 오물거리며 한참을 씹는 나를 보고 다람쥐냐고 농담한 기억이 있다. 터질듯한 볼이 오늘은 엄마 다람쥐 사이즈는 되는 듯싶다. 오랜만에 죽을 먹어 그런 건지, 죽집이 더 맛있어진 건지, 전복이 가득 들어 신이 난 건지 여태껏 먹었던 전복죽 중 가장 맛있다. 14,500원에 이런 행복과 기쁨을 얻다니 꽤나 성공적인 아웃풋 아닐까 싶은데.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려 했지만 밥 먹고 신간과 베스트셀러 코너를 둘러보니 아이 하원할 시간이 1시간 정도 남는다. 감기에 걸린 아이 먹일 콩나물국 끓이고 새 밥 짓고 다시 데리러 나가려면 이쯤엔 돌아가야지 싶다. 마트에서 딸기와 콩나물을 낚아채 계산을 마치고 부리나케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시 현생으로 돌아갈 시간.


나이가 든 건지 식욕이 줄은 건지 그래도 예전에는 세 끼는 꼬박 챙겨 먹었는데 이젠 그렇게 먹으면 속이 부대끼더라. 그래서 요즘은 두 끼는 메인이되, 한 끼는 간식을 먹거나 그냥 거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두 끼는 더욱 균형 있고 야무지게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그것도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남편과 아이가 없을 때의 식사는, 다시 말해 나 혼자 먹는 식사는 정말 대충 때우게 된다.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지 않고 누가 만들어 대접해 주는 것도 아니니 그냥 라면이나 물만두 같은 간단한 음식으로 때우자 주의다. 가족이 모두 모이는 저녁시간만 제대로 먹는달까. 뭐 대부분의 주부들이 나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만 음식솜씨가 좋으면 또 휘리릭 만들어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넘치게 부럽기도 하다.


아무튼 내가 나를 제일 먼저 아끼고 위해줘야지 누구에게 잘 보살펴달라고 보챌 것인고. 만 원대 전복죽 하나 먹은 것 가지고 호텔 뷔페 먹은 것 마냥 호사스러워한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사의 가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지 누가 대신 기똥차게 알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4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먹어도 행복에 겹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런 거다. 돈의 액수가 무조건 행복에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게 우리네 인생사의 꽤나 다행인 점 아니겠는가. 엄마가 배부르고 마음이 충만해졌으니 남편과 자식에게도 고운 말, 고운 행동이 나갈 채비가 다 되었다. 엄마가 즐겁고 행복해야 가정이 평화롭다는 말이 있듯 가화만사성은 그리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전 09화 연민으로 인한 선한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