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섭 Apr 26. 2024

그러니까, 그 예술이란 게 도대체 뭐냐고...


그것의 의미는 각자의 것


‘예술’, ‘예술성’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 해석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의견은 다양하다. 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에 가장 정의하기 어렵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단어일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 편찬 스토리를 소재로 한 영화 <프로페서 앤 매드맨>에서도 작업 중 가장 어려워하는 미션이 'art' 단어의 정의였는데, 어려워하는 상황만 보여주지 그래서 어떻게 정의되는지의 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만큼 난감하고 어떻게 정의해도 불완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예술’ 일 것이다.


하지만 말로 만족스럽고 명료하게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것의 의미는 각자의 의미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자기만의 상자’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되게 생각하는 교집합의 큰 덩어리가 존재하지만, 현대미술이라는 것은 그런 클리셰와 편견을 깨고 예술의 의미를 계속해서 새롭게 추가하고 확장해 온 작업이다.


피카소의 작품에는 ‘예술성’은 있지만 ‘예술성’은 없다. 다시 말해서 피카소의 작품은 예술성(①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모험성과 파격성)은 있지만 예술성(②작품 내부에서 느낄 수 있는 심오한 의미나 깊은 감동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①과 ②가 구분이 잘 안 되고 엉켜 있으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도 피카소를 통해 이익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정확하게 구분이 되고 정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몽롱하게 안갯속에서 막연한 두려움과 경외감 위에서 작품이 더 신비스럽게 포장이 되고 권위가 더 올라가기를 바랄 테니까.


‘예술’ 정의의 한계와 부작용


예술이란 언어적인 수단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사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각자 다 나름대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것이기에 “정답이 없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모두가 다 나름대로의 정답이다.”라고도 할 수가 있다. 거기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굳이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이 필요 없어진다.


그런데 모두가 또 내 생각 같지 않고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 궁금해하거나 혹시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렇게 답이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고 확인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예술의 정의는 어려워지고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언어를 초월하는 그 무엇인데 언어로 정의하고 한정하려 하니 거기서 또 무리가 생기고 한계와 부작용이 생기고 만다.


객관적 예술과 주관적 예술


예술의 개념을 상황에 따라서 명확히 해야 할 때가 있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모두가 다른 이해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임의로 ‘객관적 예술’과 ‘주관적 예술’로 나누어보려 한다.


객관적 예술이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권위에 의해 인정된 예술이다. 렘브란트나 루벤스의 작품 또는 베토벤의 교향곡 등, 대가의 작품들 외에도 동시대에 예술이라 부르고 인정되는 것들을 통칭한다.


주관적 예술이란, 권위로부터의 인정이나 남들과의 공감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예술이다. 이 느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렵게 설명 안 해도 다들 알고 있을 만큼, 직관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예술적 감성과 기준이 있다. “어얼…이거 예술인데!”의 바로 그것 말이다.


그래서 예술은 설명이 필요 없게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것이기도 하고, 설명이 없으면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설명 때문에 더 어지러워지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예술’이라는 한 단어를 쓰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각자의 기준과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예술관이 사람마다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게 언어의 한계와, 표층의미와 심층의미의 상이성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하고 다르게 이해하고 자기가 옳다고 우기며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의 대상인지도 모르겠고, 이것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항상 의견 차이와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듯이, 예술관의 차이로 인한 논쟁과 다툼은 삶 속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무언가가 무엇인가?


고즈넉한 저녁 길을 걸으며 하늘의 노을을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감탄을 한 경험이나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에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흘려본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아이가 가져온 맞춤법 틀린 삐뚤삐뚤 글씨체에 엉성한 그림 편지에 피식 웃음과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있고, 친구가 깎은 지우개 얼굴 조각에 놀라워해 본 적이 있고, 무명 화가가 그린 멋진 초상화에 부러워해 본 적이 있다.


누구나 다 비슷하거나 혹은 자기만의 특수한 경험과 예술적 감동에 대한 기억과 기준이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토대로 예술작품에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런 비슷한 것을 느끼고 싶어 한다. 또는 생활 속에서 그냥 무료로 얻는 예술적 감동과는 다른 무언가를 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 순수한 감동은 그렇게 값을 지불하지 않는 생활 속에서 너무나 허탈하고 손쉽게 얻어질 뿐, 커다란 가격과 권위가 붙은 미술 작품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대단한 무언가를 느껴야 된다는 강박 때문에 더 안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작품이 무언가 있는 척하지만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추구하는 공空의 예술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작품에 대해 공부를 해야 알 수 있는 사유의 작품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찾고 느끼려 한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리고 작품에 대해 공부하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느껴야 되는지 주입받고 암기하게 된다.


그 무언가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같기도 하다. 무슨 대단하게 신비스러워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


그 깨달음은 진짜로 사유의 즐거움일까 아니면 사유의 즐거움으로 이름 붙인 남들과 차별화되는 우월감일까?

이전 07화 미친놈과 예술가 그리고 사기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