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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덕이 Apr 16. 2024

느슨한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에 대해 알게 된 건 거의 10년 전,

해외 유투버의 영상을 보고서였다.

아직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에

이미 서구 사회에서는 미니멀하게 사는 생활 방식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패션과 하울 언박싱(쇼핑떼샷을 촬영하고 하나씩 품평하는 영상)에 질린 소비자들이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며 감당가능한 만큼의 삶을 살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을 사는 모습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로 해외 유투버들의 교육 콘텐츠를 보기 좋아하는 나는

이런 새로운 흐름이 너무나 새롭고 신기했다.


미니멀리즘은 곧 제로 웨이스트라는 쓰레기를 아예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생활방식도 낳았다.

제로 웨이스트의 대표주자는 4년 간 모은 쓰레기가 유리병 한 개에 다 들어간다는 로렌 싱어일 것이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닌,

무려 4년 치의 쓰레기가 저 유리병 하나에 들어간다니.

물론 그 이후에 본인의 제로웨이스트 샵을 차리고 기업화하는 과정에서 

골수 제로 웨이스트 팬들로부터는 미움을 샀지만

그래도 저 이미지 하나가 가져온 임팩트는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미니멀리즘과 제로 웨이스트의 혼재 단계인 듯하다.

서구권에서는 제로 웨이스트가 주는 압박과 불가능함으로 인해 로우 웨이스트, 즉 쓰레기 배출 0이 아닌 적게 쓰레기 배출하기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입에 착 감기는 것은 제로 웨이스트긴 하다.

그리고 미니멀리즘, 제로 웨이스트, 로우 웨이스트, 곤도 마리에, 정리수납 등등은 

그전까지 발 디딜 틈 없는 방에서 살고 있던 내게 큰 변화를 주었다.


극단적인 변화를 겪는 사람들은 보통 그 극단의 정반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은 내가 방 정리를 하지 않아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으셨으며

부끄럽지만 성인이 되어서도(그리고 사실 지금도 약간은) 정리나 청소에 대해 큰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았다.

그래서 처음 이런 생활방식을 접했을 때는 신선했다.

당시 건강이 안 좋아 집에 있는 시간이 길고 약간의 우울감이 있었던 것도 

좀 더 나은 주거 환경을 가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기왕 집에 오래 있을 거면 깨끗한 환경에 있고 싶었다.

바닥에 있는 옷가지를 발로 밀며 대충 어딘가에 올려놓고 쓰러지지 않기만을 바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일단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했다.

초등학교 이후로 이사를 한 번도 가지 않고

거의 15년 동안 한 곳에서 산 지라 짐이 참 많았다.

그리고 오래된 짐이 정말 많았다.

초등학생 때 신은 롤러블레이드도 아직 있었고

중학교 때 쓰던 단소도 있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물건들은 쉽게 정리할 수 있었는데

내 방으로 오니 상황이 달라졌다.


패리스 힐튼도 아닌데 데이트 때 한 번 입은 옷은

다음 데이트 때 입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매번 새 옷을 샀어야 했다.

학생이니 당연히 돈은 부족해서

저렴하고 값싼 옷을 사 입었고

그런 옷들의 품질은 좋지 않았다.

지금은 흑역사지만 대학생 때 처음으로 꾸미고 자신의 스타일을 찾으려고 노력한 시도는

가상했지만 나한테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옷들로 남았다.

망토도 있었고 8cm 하이힐도 있었으며 아오이 유우 같은 빈티지한 옷들도 있었다.

옷은 내 애착과 불확실한 정체성이었으며 그래서 보내는 것은 아까웠다.


몇 년간 꾸준히 물건을 버리고 한국어로 번역된 미니멀 관련 도서를 읽고

환경 운동을 찾아보고

처음으로 독립을 했다.

현재 집에서 산 지 3년째로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짐이 많이 늘었지만

이전에 비하면 비할 바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구석구석엔 짐이 있고

식탁에는 꼭 있어야 할 물건 외의 물건이 있고(옷이 의자에 걸려있는 적도 많다)

침대 옆 나이트 스탠드에는 위태롭게 책과 핫팩과 마사지볼이 엉켜 있다.

스탠딩 책상에는 취미용품이 한가득 쌓였다가 다시 정리되었다가 다시 쌓여

함께 사는 동거인의 원성을 사고 있다.

그리고 혼자 찔려서 치울 거라며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기도, 가끔은 오히려 큰 소리로 얘기하기도 한다.

집 청소와 정리는 아직도 어렵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미니멀한 삶을 살려 노력한다.


외출할 때 대부분의 경우(항상이면 느슨한 미니멀리즘이 아닐 것이다)

손수건을 구비한다.

텀블러와 포장 용기는 확실하게 테이크 아웃을 할 것이라 알 때만 가져간다.

요즘은 집 근처에서 외식할 때는 여분의 용기를 가져간다.

혹시 음식이 남으면 포장해 달라고 말하지 않고

가져간 용기를 가져가서 바로 조용히 포장한다.

추가 용기를 안 사용할 때 엄청 뿌듯하다.

아직 용기 내 레벨은 초보지만 

그래도 얼마 전부터 집 앞 분식점과 마라탕 집에서 용기를 가져가서 테이크아웃을 했을 때

얼마나 떨리고 짜릿했는지 모른다.

텀블러를 가져갈 때는 빨대도 함께 가져가는데

버블티를 좋아하는지라 버블티용 스틸 빨대도 사서 버블티를 먹을 결심을 하면 꼭 큰 빨대를 지참한다.

옷은 속옷이나 내복은 새로 사지만

몇 년 전부터는 21% 파티라는 옷 교환 파티에 가서 옷을 교환해 오고 있다.

자신이 가져간 옷 1벌을 남이 가져온 옷 1벌로 교환할 수 있어

옷 욕심이 있지만 옷을 사서 옷장 공간을 줄이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딱이다.

생리팬티와 면 생리대를 사용한 지는 5년이 넘었다.

원래도 월경통이 심하고 불규칙했던지라 화학물질을 최소한으로 닿게 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만족스럽다.

도브 비누 하나로 머리, 얼굴, 몸까지 세척해서 비용을 많이 아꼈다.

설거지는 천연 수세미로 세제비누를 묻혀서 하고 있다.


아마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줄 모를 것이다.

느슨한 미니멀리스트답게 잘하고 있는 점도 많지만

느슨한 점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보내주는 카카오톡 선물하기 선물을 배송받고 포장지와 쓰레기가 나오는 것이 불만족스럽지만 친구들한테 말해본 적은 없다.

숙소 어메니티를 안 써야지라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항상 그 작은 병들이 귀여워서 사용하고 가져오곤 한다(그래서 이제 아예 비치되지 않는 게 다행스럽다. 가져와도 그 병들을 잘 안 쓰기 때문이다.).

비누를 쓰지만 파마와 염색으로 머리가 많이 상해 헤어팩은 쓰고 있으며 여성청결제 또한 최대한 리사이클 페트병으로 만들어진 제품을 사용하지만 일단은 플라스틱 제품을 쓰고 있다.

소프넛과 천연 수세미로 만들어진 바디 타월, 면 화장솜을 사용해 봤지만 맞지 않아 포기하고 일회용 제품을 사용 중이다.


이렇게 실천하지 못하는 미니멀리즘은 진정한 미니멀리즘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미니멀리스트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명의 완벽한 미니멀리스트보다 여러 명의 미니멀리스트 지향인들이 있는 것이

환경과 지구에는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에

오늘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비록 다이소에서 스티커를 사는 것을 좋아하고

불필요한 소비도 할 때가 많지만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가장 나답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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