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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바 Apr 29. 2024

짝사랑남에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다

그 남자와 잘 되고 싶어

제가 천천히 다가갈게요


"준 강사님이 다른 사람 머리 자른다고 했대! 우리 구경 가자!!"


지민(가명)이는 게스트하우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다. 이게 무슨 말일까, 궁금증을 안고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집트 미용실을 가지 않고 본인의 머리를 직접 자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머리를 잘라주겠다는 말을 했나 보다.


"위잉~~~~"


이발기 소리가 났다. 세계여행을 하는 남자들은 장발이 많았다. 수진(가명) 오빠의 머리를 이발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이발기를 들고 있는 그의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잔근육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집트 다합에 온 지 3주 차. 다이빙 횟수가 늘어날수록 내 머릿결도 상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다.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는 기회!' 


"강사님! 저도 머리 잘라주세요!"

"네? 여자 머리는 잘라 본 적이 없는데요?"


어떻게든 그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었다.


"괜찮아요! 부담 갖지 말고 잘라주세요"

"맞아요. 준 강사님, 한 번 도전해 봐요!"


지민이의 말에 그는 도전해 보기로 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 머리를 어떻게 자를까'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그들은 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준 강사 앞에 앉았다. 내 머리는 웨이브에 길이는 어깨선이 조금 넘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 끝을 아주 조금 잡았다.


'어떡해. 손길만 닿아도 미칠 것 같아'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숨소리가 들렸다.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손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괜히 부담을 준 걸까. 그는 자른 듯 아닌 듯, 손톱만큼 잘랐다. 이러다가 하루가 다 갈지도 모르겠다. 보다 못한 지민이가 내 머리를 한 움큼 쥐어서 싹둑 잘랐다.


"이제 다듬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결 마음이 편해졌나 보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1층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지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아주 가까이서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를 좋아하지만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멀리서 지켜봤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나는 손거울을 들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잘라야 할 것 같아요"

"그렇네요. 이제 좀 감을 잡은 것 같아요"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는 내 말을 잘 들어주었다. 지민이는 준 강사 옆에서 끝까지 도와주었다. 두 시간이 걸렸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단발머리. 생각보다 괜찮았다.  


"우와! 머리 완전 마음에 들어요. 강사님 멋져요!"


손거울로 내 머리를 보고 또 보았다. 그는 손이 섬세했다. 또 다른 매력을 보고 반했다. 그도 만족하는 눈빛이었다. 처음으로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망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과 말 한마디 더 하고 싶었다. 먼저 다가간 용기로 두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내 마음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닿았기를


그 남자의 이상형


어느 날 밤. 은서(가명)와 지민이와 함께 맥주 한 잔 하기로 했다. 하루에 바닷속을 세 번씩 들어가면 화장하고 예쁜 옷을 입을 기회가 없어진다. 그날은 단발머리에 화장도 하고 치마도 입었다. 예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망설여졌다. 그때 지민이가 나에게 말한다.


"준 강사님도 불러서 같이 갈까?"

"그래. 그러자!"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게스트하우스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축구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강사님! 은서랑 지민이랑 맥주 한 잔 하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 됐네요"


라이트하우스 길거리.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합의 밤하늘과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로 앉았다. 맥주 한 잔씩 시키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 다 같이 물담배 한지가 벌써 3주 정도 됐어.

은서: 그러니까. 시간 진짜 빠르다. 근데 언니~ 머리 볼 수록 예쁘다.


칭찬을 듬뿍 담아서 말했다.


나: 그렇지? 준 강사님이 손재주가 좋은 거 같아. 미용사인 줄 알았어!

나: 강사님! 고마워요!


준 강사: 고맙긴요. 지민 씨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 같아요.

지민: 그래도 직접 자르신 건 강사님이잖아요.

나: 요즘 거울을 자주 봐요. 볼 수록 마음에 들어서요.

(사실 머리는 핑계고 강사님이 마음에 들어서 머리 자른 거예요)


은서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은서: 강사님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준 강사: 연예인 박하선이요.

지민: 와우. 눈이 엄청 높으시네요.

준 강사: 눈 안 높아요. 청순한 사람이 좋은 거예요.

지민: 청순한 사람? 헤바 언니 있잖아요!

(지민아... 왜 갑자기 급발진하니...)


준 강사는 뭐라고 생각했을까, 민망했다.


나: 아니야~ 나는 청순하고 거리가 멀지~

준 강사: 헤바씨는 밝고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죠.


그의 대답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를 했다. 그날은 모두 다이빙 스케줄이 없었다. 한 시간만 기다리면 일출 시간이었다.


은서: 강사님! 우리 다 같이 일출 보고 갈까요?

준 강사: 그래요. 일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은서: 헤바 언니도, 지민 언니도, 괜찮지?


우리도 괜찮았다.

일출이 아닌 그와 같이 있었던 순간이 더 좋았다.


그 남자와 잘 되고 싶어


언제부터일까. 하루종일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웃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은서는 나에게 말한다.


"언니~ 준 강사님 좋아하지?"

"어? 어떻게 알았어?"


"언니~ 그렇게 티를 내고 다니는데 누가 몰라!"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준 강사님도 알아?"


"아니. 아직 모를 거야"


다행이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민(가명) 강사가 하임리히법 실습 시간에 준 강사와 짝을 지어준 것도, 지민이가 준 강사 옆에서 내 머리 자르는 것을 도와준 것도, 은서가 준 강사의 이상형을 물어본 것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나의 짝사랑을 응원하고 있었다. 


내심 기뻤다. 그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나를 도와준 덕분에 그의 속마음도 알았다.


'밝고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


침대에 눕기만 하면 이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를 좋게 생각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냥 한 말일까. 이불킥을 날려가며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짝사랑에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다합의 밤은 별똥별이 자주 떨어졌다.

그때마다 소원을 빌어보기도 했다.


'제발, 그 남자와 잘 되게 해 주세요'    


그 남자가 잘라준 단발머리가 마음에 들어.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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