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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호 Mar 27. 2024

친구의 기준

행복한 강아지의 기준

강아지라면 응당 처음 만나는 모든 생명체에게 엉덩이를 흔들며 놀자고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멀리서 다른 강아지를 만나면 눈을 빛내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고, 가까이 다가가서 냄새를 맡으며 서로를 탐색하고, 마침내 몸을 부딪치고 뒤엉키면서 신나게 놀아야 만족스러운 산책을 마쳤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강이는 나의 이런 선입견을 완벽하게 부숴 주었다. 무강이는 타견반응이 좋지 않다. 타견반응이라는 단어도 무강이를 키우면서 처음 알았다. 그 때 알았다. 모든 개가 개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참지 않는 강아지는 말티즈 뿐이 아니라는 것을.      


과연 무강이는 평생 우리랑만 놀아야 할까? 말도 안 통하는 내향형 집돌이 집순이 보호자들은 무강이의 체력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무강이는 집에 돌아오면 불만족스러운 우다다를 시전하곤 한다. 친구의 존재가 절실했다. 무강이보다 우리에게 더.      


무강이의 친구들. 제이콥, 크림이, 레오, 마리


그 때 구세주처럼 다가온 개친구들이 있었다. 모두 산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난 동네 친구들이었다. 가장 먼저 친해지고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 제이콥을 먼저 꼽을 수 있겠다. 제이콥은 무강이 이전, 우주라는 강아지를 키울 때부터 만난 친구다. 우주, 무강이와 같은 견종인 보더콜리이면서 사는 곳도 가까워 하루에 세 번을 마주칠 때도 있다. 그만큼 무강이도 제이콥에게만큼은 이빨을 잘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간식을 같이 나눠먹기까지 한다. 제이콥 역시 무강이에게 젠틀한 남자친구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또 다른 동네 친구 마리도 있다. 무강이보다 한 살 많은 마리는 도베르만이다. 제이콥을 휘어잡는 무강이는 마리를 만나면 응석쟁이가 된다. 마리는 무강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짧은 꼬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놀아준다. 긴 다리로 겅중겅중 뛰면서 무강이와 노는 모습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하다.      


무강이는 나름의 이상형이 있다. 하얀 진돗개를 보면 그렇게 좋아 죽는다. 잘생긴 백구 진돗개 크림이를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점잖은 크림이는 자기만 보면 오두방정을 떠는 무강이를 이해 못하는 눈치다. 아무리 무시해도 무강이는 크림이에 대한 애정 표현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믹스견 남동생 레오도 있다. 까만 입가가 귀여운 레오는 무강이보다 어리지만 무강이보다 훨씬 차분하며, 넓은 들판을 함께 달릴 때면 그렇게 멋있을 수 없다. 무강이와 몸을 부딪치고 이빨을 얽으며 악어놀이를 하면 둘 다 목덜미가 침으로 축축하게 젖는다.      


산책을 할 때마다 항상 긴장해야 할 정도로 타견반응이 심한 무강이지만, 이렇게 모아보니 무강이의 친구 사귀는 기준이 어떤 건지 대충 짐작이 간다. 자기보다 몸이 작지 않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으며 함께 악어놀이를할 수 있는 친구. 


좀 어려운 기준이지만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강아지가 아예 없는 게 아니라서 안심이 된다. 평생 친구 없이 외로운 산책만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외향형 강아지의 인싸 능력이 빛을 발한 것 같았다.      


문제는 이 이상의 친구들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사귄 친구는 재작년에 만난 마리가 끝이었다. 무강이는 이제 자기보다 큰 강아지를 만나도 이빨을 드러낸다. 우리는 산책을 하면서 멀리 강아지가 보이면 무조건 피하고 본다. 피할 수 없을 때면 구석에 비켜서 지나가길 기다린다. 행여나 그 쪽이 먼저 다가오려 하면 황급히 손바닥을 보이며 지나가시라 권한다. 물론 그 전에 무강이가 큰 소리로 짖는다.      


바람과 원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무강이는 더 이상 친구가 없어도 되는 걸까?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나 열심히 놀면서 새로운 친구를 더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낯선 개를 만나면 밀어내기만 한다.      


하지만 무강이를 자세히 보면 불행은 보이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날엔 우리가 팔이 빠지게 놀아준다. 옷에 구멍이 날 정도로 터그 놀이를 해주고 온 몸의 원심력을 이용해 원반을 던져준다. 그르렁 소리가 날 때까지 몸싸움을 해주면 내 옷도 더러워진다. 실컷 놀고 헥헥 거릴 즈음엔 진정하라는 의미로 간식을 잔디 곳곳에 숨겨 노즈워크를 한다. 진정된 숨으로 공원을 돌면 단골 카페에 들어가 손님들의 예쁨을 받는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엎드려 큰 한숨을 쉬고 잠에 드는 일상이 반복된다.      


만약 오늘의 산책이 별로였다면 집에서 우다다를 한다. 17킬로그램의 강아지가 작은 집에서 날아다니면 큰일이 난다. 우리는 무강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또 놀아준다. 온 집안을 개털로 채운 무강이는 다시 헥헥 거리며 물을 들이켜고 난 뒤 만족스럽게 잠이 든다.      


친구를 만난 산책은 분명히 즐겁지만 그렇지 않은 산책도 충분히 즐거웠다. 친구의 유무는 무강이의 일상에서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강이에게 친구는 우연히 발견한 네잎 클로버 같은 존재였다. 만나면 너무 반갑고 기쁘고 즐겁지만 오늘 만나지 못해도 불행하지는 않았다.      


친구를 만나는 날은 특별한 이벤트가 펼쳐진 날이었다. 무강이의 친구들은 모두 우연히 만났다. 산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고 친해질 수 있었다.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오로지 개를 키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행운 같은 만남이 우리의 관계를 더욱 소중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개를 키우기 전까진 동네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동네는 그저 지나는 길일뿐이었다. 모든 게 나와 전부 상관없는 존재였다. 언젠가 잊혀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을 그런 평범한 골목길이 개를 키우면서 하나하나 추억이 심긴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무강이는 관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친구는 특별한 행운처럼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세잎 클로버 사이를 뒤져야 찾을 수 있는 네잎 클로버보다 지천에 깔려있는 세잎 클로버를 보며 만족할 줄 아는 강아지였다. 친구가 많으면 좋지만 없어도 절망하지 않는 무강이를 보며 관계에 힘겨워했던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무강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만났던 나의 지난 날이 생각났다. 지금에야 그 때 왜 그랬지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 때 당시엔 심각하게 고민했던 날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계가 쉽게 만날 수 없는 네잎 클로버라는 걸 무강이를 통해 깨달았다.         


친구 셔터를 내린 무강이도 언젠가는 또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 수많은 개가 있는데 무강이의 셔터를 올릴 만한 개가 몇 마리 정도는 더 있지 않을까? 언젠가 만날 새로운 행운 같은 친구를 기다리면서 오늘도 산책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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