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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Apr 23. 2024

비 오는 날 만난 119 구급대원

마음만큼은 천천히 나이가 들어가길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가기 위해 서둘러 짐을 챙겼다. 창밖을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신발장 옆에 둔 3단 우산 하나도 가방에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투두두둑.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방에 넣어 둔 우산을 꺼내 쓸까 하다가 때 마침 도착하는 버스에 서둘러 올라탔다. 그리고는 우산을 가방에서 꺼내 손에 쥐고 내리면 바로 쓸 수 있게 준비를 해놓았다.




비가 오는 주말 오후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혔다. 버스는 10분째 느릿느릿 운행되었고 휴대폰을 너무 많이 본 탓에 눈이 아팠던 나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바쁘게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버스가 거의 멈추다시피 선 구간이 보였다. 구급차 한대가 서 있었고 근처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을 대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 바로 근처에 구급차가 세워져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미어캣 모드로 주변을 살피며 서 있었다.




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버스에 내리기 전에 미리 우산을 들고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산을 펼치고 정류장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으로 이동했다. 방금 초록불에서 바뀐 상태라 신호를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멈춰 서 있던 구급차에서 구급대원 한 분이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길을 건너야 하시는지 나의 옆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잠시 후 구급대원분이 우산을 쓰지 않은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비를 맞고 서 있기에 빗줄기가 꽤 굵고 날씨도 쌀쌀한 그런 날이었다. 이상하게 계속해서 119 구급대원분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혼자만의 긴 갈등을 하고 있었다. 우산을 씌워 드릴까? 다른 사람들처럼 모른 척 서 있을까? 신호를 기다리는 잠깐의 고민 시간이었지만 왜인지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흘러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힘겹게 용기를 내서 우산을 구급대원분의 머리 위에 씌워 드렸다. 깜짝 놀라서 괜찮다고 답변하셨지만 신호가 끝날 때까지는 옷이 젖으니 같이 쓰자고 말씀드리며 우산을 들고 있었다. 




대기하던 신호가 지나가고 구급대원분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다시 빗속으로 뛰어가셨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느라 이미 젖은 어깨 위로 빗방울이 다시금 후두둑 떨어져 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왜인지 모르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우산을 씌워드렸더라면 적어도 젖지 않은 어깨로 출동을 하셨지 않았을까 라는 자책감 마저 들었다. 그리고 우산을 씌워드리는 일로 왜 망설이게 되었는지 잠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학교의 위치상 우리 집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면 한참을 걸어야 학교까지 갈 수 있었다. 그날도 이날처럼 아침에 출발할 때 하늘이 잔뜩 흐린 상태였다. 3단 우산을 똑같이 챙겨 나왔고, 버스에 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탓에 그날 버스도 천천히 안전운행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버스에 내린 뒤, 학교까지 걸어가기 위해 이동하는데 두세 걸음 앞에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보였다. 아마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은 듯했다.




" 우산 없어요? 혹시 같이 쓰고 갈래요? "




나는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그 친구에게 다가가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 비를 막아주며 물었다. 그 친구는 서둘러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뭔가 설레는 로맨스 영화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안타깝지만... 난 여고를 졸업했다. 그 친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대답을 했다. 같이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였다. 역시나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을 미처 챙겨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께 우산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며 십여분 정도 걷자 학교 건물에 도착했다. 후배는 나에게 이렇게 친절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난 정말 별일 아니라고 내 몸이 먼저 반응한 거라고 대답하고 후배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고등학생의 나와 이날의 내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인생을 조금 더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날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구급대원분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못했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망설이게 만들었을까?




어른이 되면 세상을 많이 알게 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가끔은 세상을 많이 아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이 맞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든다. 세상을 알게 되면서 나보다 잘 사는 타인과 비교하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면서 주변의 시선을 자꾸 신경 쓰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면서 사회의 불합리함을 느끼고는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슬픈 사실은 세상을 알게 되면서 사람을 만날 때 반가움보다는 적대심이 먼저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신체는 빠르게 노화가 찾아오더라도 마음만큼은 천천히 늙었으면 좋겠다. 

길을 걷다가 비를 맞는 누군가를 보면 망설임 없이 우산을 씌워주는 마음이고 싶다. 

조건을 재고 따지기보다는 그냥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그런 마음이고 싶다.




시간이 흘러 지금보다 더 오래 산 어른이 되더라도

마음만큼은 천천히 그렇게 나이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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