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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May 03. 2024

설거지에 최적화된 변기용 수세미

인생에는 최소한의 의심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본가에 가는 날이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7년 차가 되었다. 처음에는 흔히 말하는 향수병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타지에 있는 나의 집이 본가보다 더 편해지기도 했고, 본가에 가면 오히려 객식구 취급을 받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제는 완벽한 출가외인이 된 것임이 분명했다.




이런 내가 본가를 갈 때마다 이제는 정말 외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가장 크게 체감한 요인 중 하나는 강아지가 나를 서먹해 할때였다. 그동안 랜선 누나가 되어 신상 간식과 몸에 좋은 영양제를 종종 보내주곤 했건만... 역시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정확한 것 같다. 그리고 강아지 말고도 내가 본가에 더 이상 함께하는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집안에 새로운 물건이 생겼을 때다.




다 같이 저녁을 맛있게 먹고 음식을 준비해 준 동생 대신에 설거지를 하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은 동생과 단출하게 먹었기 때문에 다행히 그릇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가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섰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살았을 때 없었던 그릇들이 많이 생겼고, 주방 도구들의 위치도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기름진 음식을 먹었던 터라 설거지 통에 그릇을 담고 뜨거운 물에 잠시 불려두었다. 그리고는 수세미를 찾기 시작했다.




늘 있었던 자리에 수세미가 없었다. 그릇을 이리저리 들춰 봤지만 수세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동생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새로 꺼내자는 생각으로 주방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싱크대 옆 제일 바닥칸의 서랍 안에서 위생백에 담긴 귀여운 모양의 파란색 수세미 하나를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수세미를 꺼내 들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물을 틀었다. 쏴아아 하는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그릇과 수세미가 흠뻑 젖어 갔다.




" 요즘 세상 정말 좋아졌네."




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고 하더니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다. 수세미 자체에 주방 세제가 내장되어 있는 건지 물에 닿자마자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만 물에 적셔서 사용했지만 거품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설거지 수세미의 대단한 혁신에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내며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세정력도 엄청나게 좋아서 살짝만 지나가도 그릇이 정말 뽀드득 할 정도로 깨끗하게 닦여나갔다. 그리고 향기도 마치 익숙한 듯 강력하고 상큼한 레몬향이 주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마칠 때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릇은 이미 다 닦았지만 수세미에서는 끝도 모르고 계속해서 거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수도꼭지의 물을 잠그고 수세미를 잠시 말려놓기도 했지만 거품은 조금씩 자꾸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처리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거품은 싱크대를 거품 천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물을 마시기 위해 지나가던 동생이 등 뒤에서 나를 보고 물었다.




" 수세미 없을 텐데 뭘로 설거지했어? "




나는 동생에게 서랍에서 꺼낸 빈 위생백을 보여주며 때마침 하나 남은 수세미를 꺼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동생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박장대소를 하며 숨이 넘어 갈듯 웃기 시작했다. 동생의 큰 웃음에 식탁 위 떨어진 고기 조각을 노리던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며 부엌으로 다가왔다. 한참을 웃던 동생은 겨우 웃음을 멈추며 나에게 말했다.




" 그거 화장실 변기 청소용 리필 수세미야. "




아니, 조그만 버섯 모양처럼 귀엽던 새파란 색상의 수세미가

방향제처럼 상큼하고 강력한 레몬향을 풍기던 그 수세미가

사실은 설거지용 수세미가 아닌 변기용 수세미였던 것이다.




나는 애써 아니라고 이 상황을 부정했다. 그리고는 왜 수세미가 맞는지에 대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세정력과 자동으로 나오는 거품 그리고 그릇을 닦기에 최적화된 모양까지. 하지만 동생은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변기 청소용 수세미로 설거지를 한 나의 만행을 얼른 다른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왜 그 수세미만 봉투에 담겨 가장 아래쪽 칸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거품 나오는 수세미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거품은 왜 계속 나오고 있었던 건지... 

그날 이후 본가를 떠나는 그날까지 나는 가족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변기 청소용 수세미로 설거지를 한 사고를 친 상황이라 계속된 놀림에도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늘 자신의 기준에 맞춰 세상을 바라본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 일이 많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프레임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주변의 상황을 바라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나의 프레임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변기용 수세미의 외형을 보고 이건 주방용 수세미야 라고 단정 지어 사용한 것처럼 우리는 가끔 잘못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필요한 한 가지는 의심이다

가끔은 나에게 의심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혹시, 도전을 해보기도 전에 못한다고 포기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최소한의 의심은 내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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