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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 Apr 25. 2024

강남 아파트가 있으면 뭐해, 팔지도 살지도 못하는데

1993년, 엄마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동안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똑같이 밥을 주고, 잔소리가 많은 것도 똑같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갑자기 엄마는 몇 개 남은 아버지의 옷가지들을 이불보에 주섬주섬 싸더니 저수지에 가자고 했다. 저수지에 놓인 드럼통에 불을 붙이고 스웨터부터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양복처럼 늦게 넣는 옷은 천천히 타들어갔다. 엄마는 그제야 울었다. 나는 타오르는 불과 엄마의 눈물을 번갈아보며 옷이 조금만 더 늦게 탔으면 바랐다. 


다음날부터 엄마는 확 달라졌다. 당장 먹고살 거리를 찾아야 했다. 감사하게도 몇몇 분들이 일자리를 주선해 주셨다. 아빠의 회사 동료들은 미화원 자리가 있다고 했다. 엄마는 그것만은 못하겠다고 답했다. 고졸인 엄마 학력으로는 앉아서 따스하고 시원하게 일하는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딱한 사정을 들은 동사무소에서 직원이 나와 엄마에게 몇 권의 책을 주고 갔다. 얼마 뒤면 공무원 시험이 있을 거라고 했다. 10급 기능직, 그것이 현실적으로 엄마가 목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였다. 


일주일간 나와 동생은 라면만 먹고, 엄마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귀신 들린 듯 책에 빠져들었다. 말만 걸면 화를 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엄마는 정말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고작해야 서른 중반 됐을 때의 일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은 구했지만 급여는 형편없었다. 개포주공아파트의 대출금도 남았고, 세 식구 생활비도 빠듯했다. 


다행히 우리가 전세살기 전, 그 집에서 아픈 딸이 완쾌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주인집은 '전세금은 안 올릴 테니 살고 싶은 만큼 사시라'고 배려해 주셨다. 그 마음 씀씀이가 우리에겐 기적이었다. 


내 목에는 노란 나일론 끈을 꼬아 만든 열쇠 목걸이가 걸렸다. 그것은 곧 집에 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음을 뜻했다. 하굣길 비가 오면 쫄딱 맞으며 와야 하고, 저녁에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들 소리에 친구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야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공부할게 많았다. 퇴근해 컴퓨터 학원을 다녀오면 밖이 깜깜했다. 그때까지 밥을 안 먹고 있으면 또 혼났다. 차마 남사스러워서 같이 먹고 싶었다는 말을 못 꺼냈다. 결국 90도로 허리가 휘고, 머리엔 비녀를 꽂은 친할머니와 그 좁은 집에서 같이 살게 됐다. 


할머니가 우리는 보는 건지, 우리가 할머니를 보는 건지 돌아보면 참 재미있었다. 


뭔가 나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공부를 안 하고 반장을 해버렸다. 당시만 해도 반장이 한턱 쏘는 것이 관행이었다. 친구들은 옆반 반장은 햄버거를 사줬다며 뭘 사줄 거냐고 보챘다. 나도 기대됐다. 


며칠 뒤 학교에 찾아온 엄마는 연필 몇 다스를 놓고 돌아갔다. 선생님은 그걸 뜯어 3~4개씩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다행히도 반에서 인기가 좋던 터라 별문제 없이 넘어갔다. 꼴에 "먹는 건 금방 사라지잖아"라고 당당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눈치가 보이긴 했나 보다. 어린 마음에 다시는 반장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회장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은 내가 반장이 되는 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단다.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반장 어머니 역할을 잘하실 수 있겠냐"고…


엄마는 그 전화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재가 아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고 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라고 했다. 


대학시절 교직이수 과정에서 교생실습하던 중 우리 반 아이들에게 딸기우유를 하나씩 돌리다가 그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뒷목에 누가 얼음을 갖다 댄 것처럼 찌릿했다. 




나름 동네 인기쟁이로 잘 나가던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우리 이사간다."


헤어지는 친구들과 함께 울다가 집에 가서 웃었다. 부자 아파트에만 있다는 엘리베이터도 있고, 앞에 도서관도 있고, 학교도 새 건물이라는데 웃어야지 그럼.


하지만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1기 신도시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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