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정률 Apr 26. 2024

사람이 뱃 속에 있는 기분에 대하여

전설 같은 기분은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어항 속에 기포가 뽀글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아?


세 달 빠른 임신 선배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내 표정에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아쉽게도 나는 어항이었던 적이 없어서 기포가 뽀글거리는 느낌의 정체를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생리 전 증후군 처럼 배꼽 아랫쪽이 묵직한 기분일 뿐이었다. 하루종일 무언가를 달고 사는 감촉은 편할리 없다.


나는 수업시간에 졸지 않는 체질이었다. 늦잠과는 가까워도 낮잠과는 거리가 멀었다. 임신을 하자 시도때도 없이 잠에 잠식 당했다. 키보드를 치다가 졸아서 화면 가득한 'ㅁㅁㅁㅁㅁㅁ....'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난생 처음 화장실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변기 위에 앉아 잠을 청했다. 그 날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몸이 좋지 않냐며 음료수와 편지를 건냈다.


내 몸 속 다른 생명체를 처음으로 감지하게 되었을 때, 그 감촉은 물고기같았다. 여린 꼬리가 나의 안쪽 어딘가를 훑고 지나가는 감각이었다. 그것은 내가 미쳐 캐치하지 못했던 기포의 주인이었다. 이윽고 그것에 손과 발이 달리고 늘어나서, 내 배를 밀어 재끼기 시작할 땐 몸에 예상치 못한 곡선이 튀어나왔다. 침을 질질 흘리며 한순간에 튀어나오던 에일리언의 리플리처럼, 시고니 위버마냥 강인한 여성이 될 수 없었던 나는 잠도 못자고 밤새 뒤척였다.


어떻게 해도 편할 수 없었던 나날이다. 앉아도 힘들고 누워도 힘들고, 좋다는 필로우를 쌍으로 끼고 있어도 잠을 못잤다. 내안의 타자도 거주 공간에 대한 불편함을 폭력으로 호소했다. 공기 중 느끼함을 포착하는 콧구멍의 예민함과 쓸데없이 기민해지는 윗 속 사정은 더 많은 문장들을 필요로 한다. 한켠으로 생기넘치는 입맛의 변덕을 당해내기엔 밀려 올라간 장기들은 너무 비좁았다. 먹고 자는 걷고 숨쉬는 몸의 주도권을 빼앗겨버린다.



전설 같은 우리의 경험에 대해


어쩌면 그것은 전설 같은 기분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임신하기 전까지는 이해 못할 감각의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물고기며 기포라니, 나의 설명이 감각으로 이해 되는가? 태동이 심한 아이가 배에 장풍을 찍고, 발가락을 셀 수 있을 정도로 찬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임신을 하고 난 후 난 그것이 허풍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보았다.


두번째는, 결국은 모두가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임신'이라는 같은 이름의 경험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나의 경험은 다른 사람의 경험과 같을 수 없다. 한 존재의 뱃 속 생활도, 그것을 감내하는 엄마라는 생명체의 체험도, 태어난 사람 숫자만큼 많다. 우리는 '임신'이라는 기분이나 증상에 대해 말하면서도 결코 직접적으로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다. 남성도 여성도, 출산을 이미 경험한 동지들에게도 그렇다.


그럼에도 뱃 속에 사람이 있는 기분을 경험해본 사람들이 서로에게 쉽게 이야기를 교환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스스로가 경험한 고통을 이해받지 못했던 심정으로, 자신을 돌보는 마음으로, 타인의 감촉을 상상해낸다. 잠 못 들었던 밤을, 쪽잠의 달콤함을, 불편함이 증명하는 존재의 성장을, 듣기 위해 마음을 열어둔다.


전쟁을 겪은 시간보다 적게 아이가 태어나는 저출생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는 임신이나 임신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 저출생의 원인인지도 모른다.


"인류의 역사상 수많은 여자들이 이 일을 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양육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한 인간의 탄생과 성장, 이것이 보편이 아니라면 무엇이 보편인가? 여성의 이야기가 여성 위인의 이야기로만, 예외적인 여성의 이야기로만 남겨져서는 안 된다." <돌봄과 작업>


너무 달라서 더 말해져야 한다. 많은 임신 증상이, 인간이 뱃 속에 있을 때의 흔적이, 기록 되어져야 한다. 누군가가 미리 읽고 대비하기 위해서? 그런 쓸모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그 감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저 존재했듯이.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로의 이물감



태동이라는 것은 적어도 걱정, 많아도 걱정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유독 태동이 없어서 마음을 조리게 했다. (밖으로 나온 녀석은 5초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한다) 달콤한 것들을 삼키며 움직이길 한참 기다리는 날도 많았다.


임신 기간 동안 몸만큼 힘들었던 건 마음이었다. 바뀌어야만 하는 새로운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웠고, 주도권이 빼앗겨지는 미래들을 상상하는 것이 불편했다. 자주 짝꿍과 싸우게 되었다. 밀려 오는 변화들에 홀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렇게 엉엉 울었던 밤이 있었다. 아파트 아래 불빛들을 바라보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모든 게 다 울만한 이유였었던 어둠이었다. 게다가 내 몸속에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생명체에게, 슬픔으로 고통을 주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도 짓눌렀다. 거대한 외로움이 있었다.


그 때 고요하던 녀석이 힘차게 움직였다. 부드럽게 지나가던 감촉을 기억한다. 토닥토닥, 괜찮다는 듯이, 혼자가 아니야, 이제 내가 너의 삶에 있어, 앞으로는 절대 외롭지 않아, 라고 말하듯이. 온통 몸을 옥죄어 오던 고통의 감각은 어느새 위로의 감촉이 되었다. 몸 안으로 전해지는 이물감은 어느새 절대적인 고독을 지우는 상냥한 터치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꿈나라에 와서 같이 와플 먹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