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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y 05. 2024

코스트코에서 울다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아이가 학교에 간 지 삼일째 아침. 오늘의 미션은 코스트코 회원가입 장보기이다.


그동안은 굳이 회원가입까지 해서 코스트코를 이용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있었다. 먹는 데 별 관심 없는 남편, 아이와 살았던 탓에 한국에서 3인 가족으로 있을 때에도 코스트코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 2인 가족으로 살면서 뭐든 대용량으로 판다는 코스트코를 굳이 회비까지 내 가며 이용해야 할까? 게다가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홀푸즈, 트레이더 조, 알디, 웨그먼스 등 이름도 다 못 외울 온갖 그로서리샵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이었는데, 그냥 그런 데 가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 데나 가서 사 온 고기가 몇 번 실패하면서 '고기는 코스트코가 제일'이라는 이웃의 말에 결국은 회원가입을 하기로 결정. 그래, 나도 질 좋은 미국산 소고기를 싼 값에 포식해 보자구. 그리고 인터넷으로 회원가입방법을 대충 검색해 보니 온라인으로 홈페이지에서 가입하는 법과 오프라인으로 매장 안 멤버십 창구에서 가입하는 법이 나왔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오프라인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미국 오는 준비를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홈페이지와 어플에 회원가입을 하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했기에 이에 넌더리가 난 참이었다. 어느 홈피에 가입했는지, 아이디와 비밀번호들이 뭐였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노안이 와서 눈도 보이는데 영어 홈페이지를 구글 번역해 가면서 검색하는 것도 너무 지치는 일이고. 그러니 일단 보자. 여권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차를 주차장에 대고 내리는데 날씨가 흐리다. 우중충한 하늘을 보니 기분까지 같이 가라앉았다. 미국에서는 뭐든 하나 처리하는데 하루가 걸리던데 오늘은 또 얼마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려나. 제발 별 일 없이 끝나기를.


매장 입구로 들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MEMBERSHIP"이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창구가 보였다. 그 앞에 줄을 섰다가 내 차례가 되자 담당 직원에게 한껏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미국에서 영어도 잘 못하면서 이런저런 볼일을 보려면 상대의 호의가 필요할 때가 많으니 좋은 인상을 주려고 무조건 웃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멤버십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내게 어떤 멤버십을 원하냐고 묻고 몇 가지 설명을 한 뒤 미국 운전면허증을 달라고 했다. 아직 발급을 못 받았다고 말하고 여권을 주었더니 이번엔 아파트 계약서를 달란다. 정착업무를 처리할 때 여기저기서 아파트 계약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늘 챙겨 다녔는데 설마 마트 회원가입 창구에서까지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허둥지둥 휴대폰 안에 저장되어 있는 계약서 파일을 찾아 보여주면서 '실물 계약서는 집에 있다. 여기 파일에 내 이름이 나온다.'라고 떠듬떠듬 설명을 했다.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쉬더니 영어로 다다다다 말하기 시작했다. 상당 부분은 못 알아들었지만 대충 '집에 가서 인터넷으로 신청하라. 그러면 20달러 할인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20달러 할인이고 뭐고 그냥 당장 여기서 처리했으면 했다. 연이은 정착업무가 지긋지긋해서 하나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할인은 필요 없으니 지금 여기서 멤버십에 가입하게 해 달라'를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직원은 내게 등을 돌리더니 자기 동료에게 나를 손으로 가리키고 뭐라 뭐라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힘이 빠졌다. 나의 영어 실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별 차이 없지만, 미국에 와서 만난 여러 사람들 중 누군가와는 한 시간이 넘게 대화가 가능했던 반면 누군가와는 두세 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나와 소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을 알고는 내 얘기를 귀 기울여 듣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영어로 천천히 말한다. 소통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 다다다다 자기 할 말만 쏘아붙이고 대화창구를 닫아버린다. 저 사람은 후자이다. 내가 구글 번역기와 파파고를 총동원해서 설명한들 나는 오늘 여기서 멤버십에 가입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잠시 '저 사람이 나에게 할인을 받게 해 주려고 호의를 베푼 것일까?' 하고 좋게 생각해보려고 했다가, 상대가 나에게 보인 태도가 호의인지 적의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내 영어 실력에 무력함을 느끼면서 그냥 매장을 나왔다. 그래, 고기 좀 좋은 거 안 먹으면 어떠냐. 달랑 10개월인데 그냥 살자.  


그리고 며칠 뒤, 결국 나는 코스트코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회원가입을 시도했다;;; 위 경험담을 주위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고기는 그렇다 쳐도 기름값도, 여행상품도 코스트코가 싸다고, 그냥 무조건 가입하는 게 이득이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경도 공짜로 고쳐주더라.)


홈페이지에서 회원가입 절차를 마치고 그 결과지를 프린트해서 다시 창구에 내밀고 회원카드를 받았다. 이거 한 장 받으려고 이 고생을 했다니. 헛헛하구나.


이왕 온 김에 카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도 할 겸 쇼핑이나 해볼까. 엊그제 장을 봐서 다른 건 별로 살 게 없었지만 키친타월을 깜빡했던 터였다. 그거나 한 통 들고 갈 생각에 카트도 끌지 않고 넓은 매장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키친타월이 어디 있는지 찾으러 다녔다.


그런데 드디어 발견한 그것은 크기가 무슨 집채만 했다;;; 코스트코는 뭐든지 대용량이라더니 키친타월까지 12개들이로 묶어서 파는구나. 미국산 두툼한 키친타월 12개 묶음은 거진 내 몸 절반만 해서 들고 가기가 쉽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눈앞의 키친타월을 노려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가서 카트를 가져올까? 하지만 입구까지 다시 갔다가 돌아오기는 너무 귀찮다. 다른 마트에 가서 살까? 아아, 그것도 너무 귀찮다. 미국 소도시는 다 좋은데 걸어갈 거리에 동네 마트가 없는 것이 참 불편하다. 어디든 일단 차를 고 움직여야 한다.


결국 계산대까지 들고 가기로 했다. 양손으로 키친타월을 껴안고 낑낑거리며 겨우 셀프 계산대에 도착해서 줄을 섰더니 몸집이 흑인 직원 아저씨가 멤버십 카드를 보여달라고 했다. 미국에 와서 키 큰 사람 별로 못 봤는데 이 아저씨는 키도 덩치도 산만했기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며칠 전 멤버십 창구에서 만난 불친절한 직원까지 생각나서 괜스레 더 주눅이 들었다.


키친타월을 껴안은 채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려는데 잘 안 되자 흑인 아저씨가 갑자기 내 키친타월을 번쩍 들어주었다. 양손이 자유로워져서 편안하게 멤버십 카드를 꺼내서 보여주고 다시 지갑에 넣은 뒤 아저씨에게 내 물건을 돌려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게 키친타월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잠시 동안 멘붕에 빠졌다. 내 멤버십에 뭔가 문제가 있나? 그래서 내 물건을 압수한 걸까? 뭐라고 물어보면 되지?


복잡한 마음으로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데 내 차례가 왔고, 흑인 아저씨는 계산대까지 내 키친타월을 들고 걸어간 뒤 바코드 찍는 곳에 올려놓고 빙긋 웃었다. 그때 나는 알아차렸다. 그는 카트도 없이 커다란 물건을 들고 애쓰는 나를 도와주려던 것이다.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대신해서 내 무거운 짐을 들어준 것.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에 눈물이 차 올랐다. 내가 남편과 떨어져서 아이를 데리고 낯선 이국땅에 와 있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남편은 직장 때문에 올 수 없었을 뿐 오기 싫어서 안 온 것이 아니다. 내가 홀로 미국행을 결단한 덕분에 아이는 여기서 많은 경험과 기회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멀쩡한 남편을 두고 과부처럼 사는 것, 모든 일을 나 혼자 결정하고 나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것. 그런 것들의 무게가 가끔은 나를 짓눌러 숨 막히게 한다. 물론 주위에는 친절한 분들이 많이 계시고, 필요할 요청하면 차고 넘치게 도움을 주시지만, 결국 문제는 문제일 뿐이다.


도와달라고 말하지도 않는데 내 짐을 자기 짐처럼 들어줄 사람은 여기 없다는 사실이 나도 모르게 내 심장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나 보다. 그 순간 이국 땅 낯선 사람의 작은 친절이 온기가 되어 내 마음을 녹였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로 흘러나왔나 보다.


나는 울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분께 한국식으로 작은 목례를 한 뒤 계산을 마치고 마트를 나왔다.  




* 글제목은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미국 정착 꿀팁]

- 코스트코 멤버십은 이그제큐티브와 골드스타가 있다. 전자는 가입비가 비싸지만 사용한 금액의 2%를 리워드로 준다고 한다. 나는 처음에 골드스타에 가입했다가, 코스트코 트래블을 이용하게 되면서 이그제큐티브로 바꾸었다.


- 온라인으로 회원가입을 할 때 프로모션 코드를 적는 란이 있다. 구글에서 'COSTCO PROMOTION'으로 검색하면 월별로 여러 종류의 할인 쿠폰 번호가 뜨니 적당한 것을 선택해서 입력하면 된다.


- 칸쿤 여행을 검색해 보니 아고다, 익스피디아보다 코스트코 트래블이 훨씬 쌌다(아직 다녀오지는 않음). 칸쿤 여행은 특히 한국에서 접속하는 사이트들의 상품 가격과 미국에서만 접근 가능한 여행 상품들의 가격차가 큰 것 같다.


- 직원이 매장 들어갈 때 멤버십 카드를 확인하고, 물건 다 사고 나오면 영수증과 물품을 비교해서 맞는지 체크한다.


- 코스트코 상품이라고 무조건 싼 것은 아니니 가격 비교를 해야 한다. 카펫청소기를 사러 갔다가 동일한 제품이 아마존에서 더 싸게 팔고 있길래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배송시켰다.


- 소고기는 코스트코가 제일 품질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삼겹살은 그때그때 복불복이고, 보통 비계가 많은 편이지만 값이 싸니, 일단 구매해서 비계를 좀 손질해서 먹는 게 이득인 듯하다.


- 크렌베리 월넛 브래드는 버지니아 맘카페 추천으로 사 봤는데 달지 않고 담백하게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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