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승 Apr 16. 2024

아플 때만 생각 나는 사람

감기에 귤죽 

감기에 걸렸다. 이제는 감기에 걸리면 계절이 바뀌려나보다, 신호로 받아들인다. 곧 꽃 피겠지. 그러나 창 밖은 아직 찼다. 주말 아침. 아이들 아침밥 겨우 차려준 후 빈속에 약을 털어 넣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나열해 가며 우선순위를 정했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감기 걸릴 때 병원 가면 일주일 후 낫고 안 가면 7일 걸린다는 우스갯소리가 맞는 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드니 더 그렇다. 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낫는 데 걸리는 시간은 비슷한 듯하다. 그래서일까. 아파서 누워 있을 때마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이 그렇게 그립다. 감기약이야 이제는 24시간 편의점에서 살 수 있지만 그 보약 같은 음식은 어디에도 팔지 않으니.


엄마는 내가 감기에 걸리면 배숙이나 파뿌리 차, 계란을 실처럼 푼 묽은 쌀죽을 만들어주고는 했다. 약부터 먹이는 법이 없었다. 아무것도 못 먹겠다, 그래도 내 몸을 일으켜 억지로 입 안에 몇 숟갈 밀어 넣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래도 좀 먹어야 기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엄마의 말은 늘 옳았다.


죽이라도 시켜 먹을까, 하고 핸드폰을 열어 배달 어플을 열었다. 근처에 죽집이 열 군데가 넘었다. 그런데 내가 먹고자 한 죽 1인분이 1만 2천 원인데 최소 주문이 1만 5천 원이었다. 거기다 배송료는 5만 원 이상 무료. 결제 직전에 폰을 덮었다. 1인분도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2인분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쓰레기는 또 어떻고.


그러던 중 문득 생각이 났다. 서귀포 한 식당에서 다른 테이블에 내어주는 걸 본 바로 그 음식. 언젠가 집에서 한 번 만들어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 놀랐던 그것, 바로 귤죽!


사실 죽이란 음식은 본디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드는 음식이기 때문에 귤죽을 죽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만, 만든 이가 그렇게 부르기도 했고, 그 모양이 죽과 같기는 하니까.


만드는 방법은 그저 귤 까서 냄비에 넣은 후 으깨어가며 끓이면 된다. 귤즙이 흥건히 배어 나오면 따끈하고도 달큼한 귤죽, 완성이다. 귤은 비타민 c가 풍부해 감기에 효과적이긴 하지만 찬 성질 때문에 복통 내지는 설사를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데워 먹으면 그 같은 탈 없이 효능만 누릴 수 있으니 감기에 이만한 게 또 있을까. 따뜻한 귤죽을 입 안에 넣으니 온몸에 싱싱한 생기가 퍼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테이블 위 귤죽 한 그릇 차려 놓고서 앉아 있으니 갑자기 나는 엄마가 아플 때 돌봐준 적이 있던가,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 흔한 감기라 해도 그 곁을 지켜준 적이라는 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가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좀처럼 티 내지 않았던 거겠지. 아니면 내가 그토록 무심했던 거였을까? 나는 귤죽을 홀짝거리다 말고 훌쩍거리며 울었다. 엄마를 신경 써주지 못했던 것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아플 때만 엄마를 생각한다는 게, 맛있는 거 먹을 때, 좋은 데 가서 멋진 것 구경할 때에는 내 가족만 생각하면서 이럴 때에만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게, 그게 미안해 울었다.


언젠가 엄마에게 귤죽을 만들어 주고 싶다. 훨씬 맛있고, 치아와 속에도 훨씬 더 편하니 한 번만 끓여 먹어 보라고 몇 번이나 권해도 이미 충분히 맛있는 귤을 뭐 하러 데우느냐고 도통 시큰둥하기 때문.


아, 먹어봐야 아는데. 귤에서 고소한 맛이 다 난다는 거. 뜨겁게 열을 가해도 잃지 않은 그 싱그러움 또한. 아플 때 약이나 사 먹을 줄 알았는데 좋은 음식을 잘도 찾아냈구나, 기특하기도 할 거다.


귤죽 만들기 

1) 냄비에 귤을 까 넣는다. 
2) 매셔로 으깨가면서 끓인다. 
3) 귤즙이 흥건히 배어 나오면 완성! 


이전 04화 두부 한 모에 진심인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