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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스 아주미 Apr 10. 2024

응답하라 2004

아주미의 독일 새내기 시절

저녁을 먹고 치운 후 쓰레기 버리러 나간 남편이 함흥차사다. 분명히 쓰레기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이웃 누군가와 떠벌떠벌 근황 토크 중일 거다.

나는 대학 졸업 후 23살에 바로 독일로 유학 가서 한국에서 자취를 해 본 경험이 없다. 쓰레기를 어떻게 버리는지 재활용은 어떻게 하는지, 전구는 어떻게 가는지.. 

밥상은 먹으러 가면 차려져 있는 거고, 쓰레기는 스스로 사라지는 매직, 빨래는 지가 알아서 세탁기에 룰루랄라 들어갔다 나와 말려지는 줄 알았지, 그게 하나하나 다 사람의 손이, 수고가 들어가는 것인 줄 독일에 와 자취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어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어서 와, 어른 라이프 처음이지?)


독일에 처음 간 2004년도 3월.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뮌헨 공항에 31kg짜리 이민가방, 파란색 작은 기내용 가방, 바이올린을 메고 저녁 8시경 도착하여 두리번거리는데 나를 마중 나와 있기로 한 유학원 선생님은 보이질 않는다. 이럴 때를 대비해 가져간 유로 동전으로 그 많은 짐을 이고 지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선생님한테 전화했더니, 

"어머, 너 일주일 뒤에 오는 거 아니었어? "

"... 네?......"

안 그래도 사람이 만났을 때 '정신이 좀 없네' 생각을 했던 참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냥 짜증이 확 밀려왔을 뿐. 이미 이렇게 된 것, 짜증 내봐야 나만 기분 잡치지 싶어 일단 뮌헨 공항에서 뮌헨 중앙역으로 기차로 이동하기로 하고 또 짐을 이고 지고 기차를 타러 가는데, 조그만 동양여자아이가 ( 23세에 내 키는 163cm로 한국 여성 표준 체형이지만 이들의 눈에 당시의 난 쪼매난 동양인 청소년(?) 정도로 비쳤을 것이다) 짐을 주렁주렁 달고 걸어가니 멀끔한 슈트를 입은 건장한 독일 청년들이 여기저기서 도와줄까 물어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워낙 유러피언들이 곤경에 처한 이 (저요)들을 잘 돕기도 하거니와 유모차나 휠체어를 타고 기차 타려는 이가 있으면 으레 나서서 들어주기도 한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아니, 이 남자가 왜 이래. 그린라이트인가?' 혼자 잔뜩 날이 서서는 도와주겠다는 이 무안하게 "됐어!" 오바스럽게 철벽을 쳤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나의 첫 독일도시 Augsburg에는 다행히 유학원 측에서 보내준 한국 유학생들이 몇 명  나와 있었고, 그날 밤 무사히 마련해 둔 셰어 홈에 들어가 편하게 잘 수 있었다. 

WG (Wohngemeinschaft)라고 부르는 독일의 셰어 홈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주로 대학생, 사회 초년생들이 집세를 아끼고자 거실, 부엌, 등을 같이 쓰며 생활하는 주거 방식인데 나는 그 이후로도 독일 생활 약 8년간 한 번도 혼자 산적이 없고, 주로 독일인들과 함께 살았다. 집세를 아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더 큰 목적은 '독일어를 배우리라.' 하는 나의 거대한 포부와 어릴 때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지라 유창한 독일어로 Mitbewohner(동거인)과 미국 드라마 Friends 에서처럼 시크하고 재미있게 외국 생활을 해보리라 하는 로망도 있었다. 

물론, 그 로망이 실현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그 당시 내 독어실력은 고등학교 내내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지만 태정태세문단세를 이은 국민 암기송이라는, 모두가 읊지만 어디에 쓰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이하생략), hallo, danke 정도 할 줄 아는 독일 생후 12개월 아가 정도였으니, 같이 사는 아이들이 행여나 말 걸까 마주치면 멋쩍게 씩 웃으며 마이클 잭슨마냥 뒷걸음질로 방으로 쓱 들어가기 일쑤였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뭇 썸남들에게 나의 근황을 알려주는 매개체로 지금은 인스타, 틱톡이 있지만 그때는 싸이월드!! 가 있었는데, 

  'ㄴr는 ㄱr 끔 눈물을 흘린다.' 

모세의 '사랑인걸' 틀어놓고 감상에 흠뻑 젖어 셀카 흑백 사진 하나 투척, 뭔가 아련하게 '그리움' 한마디 적어놓는 이불킥 포스팅 시전도 했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spottify에서 Y2K 싸이월드 베스트 검색해 듣고 있는데, 역시 찬란했던 젊은 날을 떠오르게 하는 음악은 언제 들어도 좋다. 그립ㄷr.


처음에 같이 살았던 친구들은 어학원에서 운영했던 셰어홈이라 나처럼 외국인들이었는데 둘 다 나보다는 독일 짬밥이 오래돼서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다. 한 명은 Maria라는 이태리 아이였고, 창문도 없는 지하방에서 살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다른 한 명은 카메룬에서 온 의대를 다니던 남자아이였다. 

마리아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퇴근 후나 되어야 마주치곤 했는데 카메룬 아이와는 내가 들어간 후 몇 주 후부터는 한국에서 가져간 쿠쿠밥솥에 밥을 해서 김에 싸 고추장에 같이 찍어먹곤 했다. 이제 그도 어엿한 독일 의사가 됐겠네. '오 갱끼 데쓰까!' 얘야 잘 있니? 독일 쪽을 향하여 잠시 외쳐본다. 

그렇게 살던 집에서 두 달 만에 공부하고 싶은 교수님을 따라 Baden Württemberg 주의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그 후에 스위스로 올 때까지 나의 독일 생활 8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아, 원래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그 시절을 생각하니 떠오르는 그 시절의 감성, 얼굴들, 온도, 습도...

처음 이사 가서 살던 집에서는 Alex와 Martin이라는 두 독일 남정네와 함께 살았다. 지금이야 남자 둘이랑 살았나 보다 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독일 남자 둘과 함께 산다 하면 한국 유학생들 대부분이 '오, 진짜? 괜찮을까? 불편하지 않아?" 이런 반응이었고, 그 사실을 안 우리 부모님도 첫 주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자라는 둥 ㅎㅎ 두 남자는 몰랐겠지만 그들은 이미 공공의 적,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알렉스둥절, 마틴둥절). 

굉장히 다행이었던 건 두 남자가 번듯한 직장도 있는 좋은 아이들이었다는 것. Alex는 변호사이고, Martin은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독일어가 서툴러도 너무 서툴렀던 그때의 내가 스리슬쩍 영어로 대화라도 할라치면, 

"어, 너 뭐야. 독일어로 해야지. "하며 서툰 독일어를 더듬거리며 하는 내 말을 끈기 있게 들어줬고, 저녁에 거실에서 만나면 어학원에서 그날 배운 거 써먹어야 한다며 '오늘의 독일어 phrase를 물어봐준 고마운 친구들이다. 지금 생각하면 독일 애들끼리 살다가(나의 방에 전에 살던 아이도 독일인 남자로 그들은 그렇게 삼총사였던 듯) 말도 잘 못하는 동양 여자애가 들어와서 성가시기도 했을 텐데 자기들 놀 때 끼워주고 같이 놀러 가자고 한 건, 이건 그린라이트? ㅎㅎㅎ


나의 유학시절 동지들과

그 후에 여러 동거인들이 이직, 결혼 등의 이유로 그 집을 떠났는데 대충 세어보니 그 집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이 7명 정도 된다. 프랑스 Toulouse에서 독일 공대로 유학 왔던 아침마다 딱딱한 Zwieback에 딸기잼을 들이부어 먹었던 Stephanie, 엔지니어로 일하던 이름이 뭐더라? 샐러드를 맛있게 만들었던 독일남자, 청소를 드릅게 안 해서 내가 잔소리 어마어마하게 했던 Violeta, 그리고 나와 베프였던 모든 사람들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 우린 정말 친구였던 건축학도 Robin, 나중에 다른 아파트로 이사 가서는 학교 친구였던 러시아인 Mascha, Mascha가 독일인 남자 친구네로 이사하고는 이사 온 또 다른 학교친구 절세미녀 Luanda.. 

Robin을 비롯한 Luanda, Mascha랑 살 때는 내가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일할 때라 3~4시간짜리 오페라가 끝나고 밤늦게 집에 오면 맥주도 같이 한잔하고 냉장고 털어서 야식도 만들어 먹곤 했다. 아니다, Mascha는 물만 먹어도 살찐다며 야식 먹는 내 앞에 앉아 먹진 않고 촉촉한 눈으로 지켜보곤 했었다. 독한 것. 


함께 웃고 울고 했던, 같이 살았던 친구들은 그 당시를 생각하면 미소 짓게 하는 소중한 인연들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이들과 Facebook으로 연결되어 가끔 근황을 듣는데, 지금은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이태리에서, 또 스위스에서 다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어엿한 성인, 아니구나 어엿한 중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로망 하던 Friends 속의 삶을 산 것도 같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인 건가? ㅎㅎ

그립다, 20대의 젊음이 예뻤던 나! 


신청곡: 에코의 '행복한 ㄴr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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