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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pr 23. 2024

내 이름과 사주에는 결혼이 없다고 했다.

우리 집 일본인 #21

"아이고, 이름에 흙 토 자가 이렇게 많아? 결혼은 어찌하려고 벽을 이렇게 많이 쳤나. 이름 어디서 지었어?"


대학 새내기 시절, 필수교양 과목에서 있었던 일이다. 첫 수업에서 교수님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주시더니 학생들에게 각자의 한자 이름을 적어내라 하셨다.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일이 벌써 몇 년이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당황했다. 순 한글 이름을 가진 친구들만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나이들이 벌써 스무 살인데 자기 이름도 못 써?"


우리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드러난 것일까.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학부생에게 교수님은 쓴소리와 함께 주민등록증을 윤허해 주셨다. 수강생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들을 취합한 교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확인하셨다. 이름과 얼굴을 외우시려는 의지 반, '어떤 물건이 제 이름도 제대로 못 쓰고 개발새발 그렸는가' 구경하시려는 마음 반,이었을 것이다. 


"박예은이? 자네는 한자가 없네? 혹시 교회 다니나? 그럼 예수님의 은혜겠구먼?"

"황희! 정승이면 지금의 국무총리에 준하는 아주 높은 관직인데, 대단한 이름이네"


호명과 잔잔한 스몰토크가 계속되던 가운데, 내 차례에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내려 꽂혔다. 외할아버지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사주 봐가며 지어주셨다 들었는데 난데없이 결혼 못하는 이름 취급을 받으니 억울하기도 했다. 뚱한 목소리로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건데요' 하고 대답했다.


"아, 그래? 할아버지가 한학을 하셨나? 그럼 좋은 이름 잘 지어주셨을 거야"


교수님은 대충 얼버무리시고는 다음 학생의 이름을 부르셨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부정한 것이 되어 당황하셨던 것일까. 


그날 집에 돌아가 국문과 교수님이 내 이름을 보고 이리 말씀하셨다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다음날 외할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하셨다. 가을날 밤새 곡식으로 가득한 곳간에서 배부르게 먹고 쉴 시간에 태어난 쥐에 맞춰 지은 이름이라고, 결혼 못하고 그런 이름 아니라고 해명까지 해주셨는데, 얼마 후 친구 따라 호기심에 갔던 명동의 사주카페에서 '결혼은 안 들어있는데'란 말을 듣고 말았다. 


할아버지....?





이제까지 내 인생에 접점도 없던 낯선 교수님과 처음 본 사주카페 아저씨가 연달아 '네 인생에 결혼은 없겠는데?'라고 입을 모은 사건은 갓 스무 살이 된 내게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지금이야 비혼도 하나의 선택지지만 그땐 인간의 인생레일은 입시-대학-취업-결혼으로 정해져 있고 당연히 제 때에 맞춰 거쳐가야 하는 수순이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나의 이름과 사주가 말하고 있다는 '결혼은 없다'는 이제까지 세상을 움직여 가던 '보이지 않는 손'이 내게 보내주는 모종의 사인과도 같이 느껴졌다. 딱히 결혼을 꼭 해야지! 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지 않는 것'과 '그렇게 정해져 있어서 못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며칠 뒤, 이번엔 지인 언니가 알아다 준 종로에 있는 용하다는 사주카페에 또 갔다. 바로 어제까지 철학관이란 간판으로 운영하다가 사주카페의 유행으로 급하게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커피를 타주기 시작한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거기서는 결혼 이야기를 딱히 하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저 다른 데서 사주 봤는데 제 사주 안에 결혼이 없대요. 대학 교수님도 이름이 이래서 결혼 어떻게 하냐고 하셨고요. 진짜일까요?'라고 물었더니 '에이, 아니야. 결혼을 왜 못해. 그런 거 믿지 말라'라고 하였다.


선생님...?





하지만 내가 그런 것들을 믿던 믿지 않던, 그 기억들은 곧 저절로 바스러졌다. 진짜 정해져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운명을 기억하기보다 휴학을 하고 처음 해보는 아르바이트, 일본에서의 워킹홀리데이, 그리고 복학 같은, 더 중요한 일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해야만 하는 일도 찾지 못한 나는 이미 남들은 애초에 다 끝내놓은 과제를 들고 뒤늦게 혼자 끙끙대느라 친구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그런 것들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일본에 와서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찾아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사람이 있다면 하겠지만, 좋은 사람은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가요, 주위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초혼으로요. 하하"


나이를 먹으니 결혼은 어쩔 거냐는 질문도 늘었는데, 누군가 내게 결혼에 대해 물으면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전제조건으로는 '내가 더 이상 내 삶을 버겁다 느끼지 않게 되었을 때'가 붙었지만 어차피 흥미본위로만 묻고 있는 것에 그런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좋은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가끔가다 마음에 내려앉은 불씨는 쉽게 꺼졌으며, 내가 어떤 결심으로 일본에 왔든 나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고 나를 기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쌀도 없는데 고기 먹을 생각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무수한 내 삶의 진지한 고민들 가운데, 결혼이 주제로 올라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어쩌면 외할아버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이름'에 집중한 나머지, 손녀의 결혼은 깜빡하셨을 것이고, 사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나를 팔자안에 요리조리 밀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결혼이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 시작했고, 덜 외로울 것 같다는 어렴풋한 동경 이외에는 결혼을 해야 할 이유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행복해 보이던 친구들은 결혼을 하지 않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를 어플에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결혼에 관련된 농담을 자주 했다. '너 진짜 재밌다, 나랑 결혼해 줘', '다음 주에 결혼해 버리자', 이런 말들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고,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이미 우리 애가 얼마나 자랐고, 둘째 계획이 어떻고 하는, 인생의 스테이지가 변화해 감에 따라 화제도 내용도 바뀌어가고 있는데, 우리만 아직도 학생 때처럼 그 자리에 정체 중인 것을 자학하는 일종의 밈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 고백을 들었을 때에야 처음 의식해 본 결혼도 그와 사귈 수 없는 이유를 찾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어쩌면 결혼까지 갈지도 모르는, 그런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답안을 내기 위한 도구. 이때까지만 해도 내게 있어서 결혼은 아직 이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그는 종종 '우리가 결혼하면' 같은 꿈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종종 새내기 시절의 그 교수님과 사주카페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우리가 만약 결혼하면'같은 미래예상도는 어디까지나 '예상'에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그때 그 점괘들이 진짜일 수도 있으니까 순간의 달콤함에 빠져 괜한 헛바람이 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그다음'을 보고 있었다 보다. 지금보다 조금 더 크고 따뜻한 공간에서 여전히 맛있는 것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끊기지 않는 웃음과 대화가 머무는 매일.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결혼은 나의 그것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모양새를 띄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삶의 기반을 두고 있는 곳은 너무 멀었고, 일주일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것에도 갈증을 느꼈지만, 그는 '다 놓고 나만 따라오라' 할 자신도, 그렇다고 잘 다니고 있던 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도쿄로 상경할 용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도 생각하고 있다 하니, 지금이 프러포즈를 할 기회고, 어떻게든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진짜로 하는 말이야?"


사귀면서 때론 싫은 부분도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내게 여전히 좋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이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귀국도 생각하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급해져 그냥 해보는 소리는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고, 내게 그가 그러하듯 그에게 나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닐 텐데 왜 나와 결혼하고 싶다 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의 결혼이 어떤 과정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고는 하는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럼 가짜로 이런 말을 하겠냐는 그에게 나의 대답을 하기에 앞서 한 가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국인이랑 사귀는 거 아셔?"

"아니, 아직."


언젠가 미안한 듯한 얼굴로 했던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한국을 싫어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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