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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08. 2024

딸이 1억을 달라고 했다

천만예요, 천만원입니다

2024. 2. 10.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1억 준비는 됐겠지?"


다짜고짜 딸이 실실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준비라니 무슨 준비?

얘가 또 갑자기 무슨 느닷없는 소리람?


"엄마, 1억 있어?"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이냐.

1원이면 모를까, 1억이라니! 1억씩이나?

없다, 없어.

있어도 없고 없으니까 없다, 진심으로 없다.

"엄마, 오늘 잊지 않았겠죠? 1억은 준비했어?"

얘가 이렇게나 계산적인 어린이였나?

엄마한테 일요일 아침부터 1억 타령하는 어린이라니!

"엄마가 그랬잖아. 오늘까지 못 끝내면 나한테 1억 준다고."

아, 그 말이 그 말이었구나.

하지만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 1억이 아니다. 1천만 원이다. 내가 제시한 건 분명히 1천만 원이다.

당연히 1억 도 없지만 1천만 원도 없어서, 1천만 도 없으니까, 못주니까 그런 말을 남발한 게 화근이었다.

기원전 3,000년 경에 나는 그만 성급하게 딸에게 약속하고 말았다.

"합격아, 우선 책상 냄새 좀 빼고 방 정리 되면 그때 책상 넣자."

새 책상을 딸 방에 들이려고 두 달 전에 구입한 게 있다. 새 제품을 바로 쓰긴 좀 그래서 물건을 받은 날 당장 1차적으로 네 멤버가 닦고 또 닦은 다음 베란다에 놓고 환기를 했다.

애초에 내 계획은 한 두 달 넉넉히 할 속셈이었다.

물론 날씨를 봐 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이에 비가 오늘날이 많았고 미세먼지가 심한 날도 꽤 많아서 내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책상을 늦게 방에 넣고 싶어 했고, 딸은 가능하면 빨리 들이고 싶어 했다.

한 달이 넘어가고 두 달이 되어갈 무렵 더 이상 참지 못한 딸이 강하게 나왔다.

"엄마, 이제 인간적으로 넣어도 되는 거 아니야? 한 달도 넘었는데?"

"이왕이면 최대한 냄새를 좀 빼려고 그러지. 넌 잘 모르겠지만 냄새가 아직도 나."

오래 둘 수록 좋은 건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냄새 빼는 시간이 길 수록 좋을 거라고 막연히 나만 생각해 오던 차였다.

자연환기 말고도 인위적인 방법으로 새 제품 냄새를 빼주는 요망한 물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혹시라도 딸에게 해로울까 싶어서(가끔 난 그런 일에 너무 집착한다, 그런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선택한 방법이 공기를 순환시키면서 냄새를 빼자는 거였다.

"그래도 이제 그만하면 된 거 같은데?"

"한 번 방에 넣으면 다시 빼기 힘들잖아. 할 때 좀 하자. 엄마가 때 되면 넣어 줄게.

"그러다가 나 개학하겠어. 설마 그때까지 안하진 않을 거지?"

아니, 마음 같아서는 중학교 갈 때쯤에나 방에 넣어주고 싶다.

"개학 전에는 해결해 줄게. 걱정 마."

"정말이지? 그럼 만약에 그때까지 못하면 어떡할 거야?"

"엄마가 너한테 천만 원 줄게!"

물론 그렇게 큰돈은 내 수중에 없다.

어차피 줄 돈이 없으니까 그때까지 처리하겠다고 큰소리친 거다.

어쩔 수 없이 그때가 되면 난 딸 말대로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백지 수표 남발한다'라고 한다지 아마?

그러니까, 그 1억씩이나 되는 돈, 그 말이 그리하여 나온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말한 건 1천만 원이었지 결코 1억씩이나는 아니었다.

내가 그 큰돈이 어디 있어서?

평생 그 돈이 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근데 합격아, 엄마는 그때 너한테 천만 원 얘기했는데 1억은 무슨 소리야?"

"엄마가 그때 1억 준다며?"

"내가 언제?"

"그때 엄마가 분명히 그랬어."

"아니, 분명히 안 그랬어. 엄마한테 1억이 어디 있다고 준다고 했겠어? 있지도 않은 돈을 어떻게 준다고 그래? 엄마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어."

당장 천만 원도 없는 마당에 1억은 가당치도 않다.

"그랬나? 난 1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네가 착각한 것 같아. 엄마는 그 돈도 없지만 있어도 그렇게 약속 안 했을 거야."

"하긴, 엄마가 돈도 없는데 그렇긴 하네."

"아무튼 엄마가 돈이 없어서라도 기한 맞춰서 해결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마감기한을 반나절 남기고 나는 내 온 힘을 다해 딸 방을 정리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실 그동안 내가 딸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써왔었다.

살짝 동떨어진 방이라 혼자 있기 딱 좋았다.

그런데 새 책상이 도착하니 딸이 나보고 방을 빼라는 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나와야만 했고 내가 쓰던 것들이니 정리를 해야만 했다.

딸의 방이긴 하지만 사용은 내가 했고 이것저것 들이고 한 사람도 나였으므로 애먼 딸에게 방 정리를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양심상.

"엄마,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천만 원 줄 준비 됐어?"

"아니, 아직 시간 남았어. 끝낼 수 있어. 나중에 부르면 오기나 해."

결국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천만 원을 주지 않기 위해, 천만 원이 없어서 그렇게 마감기한에 임박해 모든 걸 끝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그 명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수중에 천만 원이 없어 방을 정리하고 빼줘야 하는 숙명의 어머니는 마감기한에 임박해 모든 걸 해결할 만큼 강하다.

헐레벌떡이긴 했어도 강한 건 강한 거다.

그 강한 어머니의 다음날은 삭신에 동반되는 신경통뿐이었다나 어쨌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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