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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12. 2024

삶과 죽음이 한 풍경이 된다.

대성동 고분군_ 왕따라고 부르지 마세요.


근처에 갈 곳이 많다던 택시기사의 말씀이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여운처럼 남아서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치 여러 개의 선택지를 받아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미 결정을 내린 후였다. 바로 앞에는 '대성동고분박물관'이라는 간판과 함께 둥근 지붕의 낮은 건물이 보였다.


그래, 여기부터 들어가자!라는 생각이 살짝 스치긴 했지만 걸음은 이 건물을 지나치고 있었다. 호기롭게 첫날부터 한 건(?) 하겠다던 계획은 더위와 배고픔이라는 지극히 원초적인 감정에 쉽게 무너졌다. 아니 그보다는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이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좋아한다고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러 온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좀 늦은 오후라 시간이 애매하다는 걸 핑계 삼아 근처에 있을 '많은' 갈 곳은 그야말로 아득했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박물관도 다음으로 미룬다. 발굴된 유물들은 모두 박물관 안에 있을 테니 터만 남은 고분군에 뭐 볼 게 있을까 싶었지만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부드러운 능선은 오늘 처음 느끼는 고요함이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대성동 고분군 쪽으로 올라갈 때 보이는 풍경이다. 뜬금없이 '언덕 위의 하얀 집'처럼 불쑥 솟아있는 아파트 건물이 풍경을 해친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작심하고 일부러 먼 길을 찾아가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 속의 짧은 쉼, 처럼 즐길 수 있는 옛것을 곁에 두고 산다는 것도 퍽 매력적일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내 생각은, 주택가 한 가운데 묘지공원이 있는 환경이 낯설지 않아선지도 모르겠다. 밴쿠버에선 아침 산책하는 길에 자주 묘지공원을 지나쳤다. 물론 예쁘게 잘 꾸며진 공원같아서기도 하겠지만 바로 길 건너에 늘어서 있는 주택가를 지나면서도 불편하거나 풍경을 해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무감각을 깨우며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음을 깨닫고 삶이란 문장의 마침표가 될 죽음보다는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새삼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곤했다.



아마도 이 계단때문이었을 것이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데 우산, 아니 양산도 없고 그늘 한 군데 없는 저 언덕을 오를 생각을 한 것은. 잘 자란 여름풀을 눕히고 자장가라도 부르듯 놓여있는 돌계단은 너무나 다정하고 예뻐서 오늘은 이 계단을 만난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한 기분마저 들었다.



고분군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유난히 시선을 끄는 두 사람이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양산을 쓴 여인과 어린 사내아이였는데 더운 날씨인데도 아이는 투정도 부리지도 않고 오히려 해맑게 웃으며 햇살 속을 뛰어다녔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내게까지 들렸다. 문득, '클로드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Woman with a Parasol)이 떠올랐다. 모네가 산책 중인 그의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을 그린 그림이다. 만약 저 초록의 능선에 붉은 '개양귀비꽃'이라도 피었다면 또 다른 모네의 그림도 떠올랐을 것이다. 미풍에 날리는 드레스를 입고 프릴 달린 양산을 쓴 것도 아니고 각도도 다르지만 현재 속에 누워있는 오래된 유적지가 주는 묘한 기류와 구름이 강처럼 흐르는 여름 하늘, 이 모든 것을 즐기는 두 사람은 명화보다 더 다정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 같았다.



대성동고분군은 경상남도 김해시 중심부에 있는 금관가야 최고지배층들의 공동묘지다. 북쪽에서 시작해 남쪽을 향해 L자형으로 길게 휘어진 낮은 구릉에 형성되어 있다. 이 지역은 2세기경부터 6세기경까지 장기간에 걸쳐 무덤 지역으로 사용되었는데, 거대한 무덤은 전망이 좋은 구릉의 정상부에 아래에서 위로 열을 지어 조영 되어 있고, 작은 무덤은 구릉의 사면에 무질서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신분의 격차가 있는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경성대학교와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의해 1990년부터 2014년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고인돌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3-6세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이 4~5세기에 번영한 금관가야의 옛 터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래서 변한의 소국의 하나이자 금관가야의 모체인 구야국(狗倻國)의 국가적인 성장 과정이나 그 특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이 오래된 유적지의 주변은 높은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의 모습이다. 볼품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유적지와는 어울리지 않아 흉물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잘 보존된다면 이것도 김해의 매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옛것의 정취를 마치 일상의 한 부분처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더운 날씨였는데도 고분군 주변을 둘레길처럼 걷고 있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띄었다. 나도 산책하듯 오솔길처럼 놓인 길을 따라 걸었다.



올라온 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자 멀리서 보아도 무척 큰 나무가 두 그루 보였다. 팽나무 같았다. 얼핏 보아도 옛 마을의 당산나무 느낌이다.



특히 앞쪽에 있는 나무는 평지와 경사면에 걸쳐 있었는데 가지들이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수형이 우아했다. 나무 아래에는 대성동 고분 제73호분의 자리가 보존되어 있다. 한 눈에도 품고 있는 세월이 느껴졌다. 어딘가에 나무에 대한 설명이 있음 직한 생김인데도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검색을 했는데 나무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고 뜻밖으로 '왕따 나무'라는 별칭을 발견했다. 왕따라니. 그 숭한 표현이 왜 나무의 이름이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이것 또한 수긍할만한 설명이 없었다. 다만, 이곳이 요즘 유행하는 인생샷을 찍기 좋은 포토존으로 알려졌다고 하고 여러 장의 멋진 사진들을 보니 그 이름에 대해 짐작되는 건 있었다.


나무가 워낙 크고 주변이 넓어서 사진들은 모두 마치 허허벌판에 나무 한 그루만 있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 실제로 두 그루인걸 모르는 사람들이 '왕따 나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아닐까. 하지만 하필이면 왜 '왕따'라는 어휘를 선택했을까. 혼자 있는 걸 '따돌림'을 당해서라고 판단하는 생각의 근간은 무엇일까. 누군가 재미로 붙였을 이름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고 누가 놀린다 해도 생각이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았다. 기어이 나무에게 미안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오직 한 그루였다해도 적당하지 않은 별칭이지만 더구나 이 나무 곁에는 그늘이 더 깊고 뭉근하게 생긴 친구 나무가 한 그루 더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 나무는 가지가 거의 땅에 닿을 듯했고 그늘도 무척 넓고 깊어서 나무 아래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풍 나온 연인들 같았다. 처음에 이 나무를 보며 걸을 땐, 그늘에서 잠시 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끝까지 내려갔던 걸음을 그대로 돌렸다. 그리고 올려다본 풍경.



대성동 고분군으로 올라가는 방향은 세 군데인데 '대성동 고분 박물관'이나 '김해 시민의 종' 방향에서 올라오는 길보다 이쪽이 조금 험하다. 하지만 절집이나 궁궐을 지을 때 가파른 언덕이나 계단을 먼저 만들어 올라가게 하는 이유는, 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상태로 힘들게 올라가서 드디어 아름다운 건물을 만났을 때의 장관을 극대화하기 위한 설계라고 하지 않던가. 이쪽 길이 그렇다. 게다가 입구에 묵묵한 세월로 깊은 그늘을 만드는, 나는 '당산나무'라고 부르고 싶은 팽나무 두 그루도 산다.



고분군 위에서 내려다본 '대성동고분박물관'이다. 이곳은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뮬과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박물관은 다른 날 오기로 하고 금관가야 왕들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푸른 언덕을 내려왔다. 허술하고 배고픈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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