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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Mar 25. 2024

[쿠키글] 쓰려다 못다 쓴 이야기들

브런치북을 연재하면서 생각했던 몇 가지 소재들이 있다.

그런데 필력이 부족해서인지, 쓰려다 보면 막히고 쓰려다 보면 막히는데 왠지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예능 미방분이나 쿠키 영상처럼, 쓰려다 만 이야기들을 좀 풀어 보려고 한다.


1. 사장님의 마일리지

남편은 서울과 지방을 오갈 때 비행기 혹은 KTX를 탄다. 그것도 비즈니스 클래스나 특실만 탄다. 사장은 그래도 된단다. 당일 이동시 편안하게 이동을 해야, 도착 후 생생한 컨디션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비즈니스나 특실을 타는 것은 일을 더 많이 시키기 위한 회사의 미끼라나 뭐라나..

사장이 되기 전에도 워낙에 해외 출장이 많아 비행기 마일리지가 많이 쌓여 있어서, 결혼하자마자 가족등록하고 내가 남편의 마일리지로 비행기를 다 예약해 사용했더랬다. 사장이 되고 비싼 티켓을 끊으니, 마일리지 올라가는 것이 기하급수적이다. 오예~~ 여보의 마일리지는 모두 내 거다.  


2. 사장님의 모닝캄 프리미엄

사장님의 마일리지가 많으니 당연히 남편의 항공사 등급은 높다. 그래서 난 남편과 동행하는 비행기 탑승을 기다린다. 항공사 프리미엄 고객은 예약할 때부터 좌석 선택의 폭이 넓다. 내가 예약할 때에는 늘 날개 쪽 이후의 좌석만 오픈되어 있는데, 남편이 예약을 하려고 하면 퍼스트 클래스 바로 뒤쪽 자리부터 오픈된다. 짐을 부칠 때에도 남편의 등급은 빛을 발한다. 긴 줄을 서지 않고 따로 분리되어 있는 라인으로 빠르게 짐을 부칠 수 있다. 비행기 탑승 때에도 우선 탑승 고객으로 분류되어 언제든지 비행기에 들어가고 싶을 때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다. 남편이 선택한 편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 승무원이 따로 인사까지 해주시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착륙해서는 짐을 찾을 때에도 우리 짐이 가장 먼저 나오기 때문에,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내가 아들을 데리고 둘이 비행기를 타야 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이 슬프다.


3. 사장님의 속옷빨래

남편의 지방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 가사 도우미가 오신다. 청소, 설거지, 빨래, 세탁소 맡기기 등등 집안일을 도맡아 주신다. 취임 초기에 막 주말 부부를 시작했을 때 남편의 지방 집에 가 보면 정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선반 위 먼지며 화장실 물때며 홀아비의 삶이 가득한 집이었다. 그래서 가사 도우미의 등장은 나에게도 정말 마음의 안식을 주었다. 가끔 주말에 남편집에 가서 아들과 막 어지르고 서울행 기차를 탈 때에도 마음 편하게 올라올 수 있다. 가사 도우미님이 치워주시겠거니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빨래하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가사 도우미 계약서에 속옷빨래는 들어가 있지 않아 빨래를 내놓을 때 속옷은 분리하고, 본인이 빨아 널어 두어도 도우미님이 개지 않아도 되도록 잘 분리해 둬야 하기 때문이란다. 속옷 빨래에 대한 부분이 가사 도우미 계약의 보편적 조항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좀 이해가 되기도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건 가사도우미님께 감사하다.  죽은 집을 살려주셔서.


4. 사장님의 허술한 공식일정

언젠가는 남편이 주말에 서울 집에 와서 잘 쉬다가 갑자기 넥타이를 찾는다. 다음날 공식적인 자리가 있어 양복을 입어야 하는데, 넥타이를 깜박 잊고 안 가지고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이 사는 제부에게 부랴부랴 연락해 밤늦게 넥타이를 공수해 왔다. 원래 잘 매던 넥타이 스타일도 아니고, 준비한 양복과 썩 매칭되지는 않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다음날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남편이 사진을 보내왔다. '오 마이 갓!' 남편의 공식 일정은 영국 대사님과의 미팅이었고, 영국 대사님과 남편의 사진이 떡하니 인터넷 기사에 올라왔다.

사진을 캡처해서 동생네 가족에게 보냈다.

'형님,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제 넥타이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공식 행사에 허술한 사장님에게 우리 제부는 말도 참 이쁘게 한다.


5. 사장님이지만 남편

언젠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해댄 날이 있다. 과자 먹을 때 쟁반 위에 놓고 먹어라, 외출하고 오면 옷을 옷걸이에 걸어 두어라, 아들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라, 나랑 이야기할 때는 집중을 좀 해라 등등등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남편이 볼멘소리로 이야기한다. 남편은 그날 하루종일 다양한 미팅을 했단다. 미팅 중에는 늘 직원들이 자기 말에 호응하고, 고객들은 남편의 말을 경청했단다.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고 코칭을 하고, 사람들은 자기를 존경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단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자기는 늘 찬 밥 신세란다. 아들내미는 잘 놀다가 '아빠 싫어'하면서 엄마랑 자려고 하고, 마누라는 집에서 잔소리나 하고, 컴퓨터 켜 놓고 일이라도 할라치면 아들이 쓰는 작은 앉은뱅이 휴대용 탁자를 펴고 일해야 한단다.

그런데 어쩌나, 당신은 사장이기 이전에, 남편이자, 아빠인 것을.


6. 큰 나무의 그늘이 깊다

남편이 사장이 되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지위에 따른 혜택이 생기니 가족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들이 종종 생겨났다. 시댁 식구들 또는 친정 식구들을 모시고 제주도에 있는 타운 하우스에 여행을 가거나, 가족들과 골프를 함께 치거나, 가족 행사가 있을 때 혹은 부모님이 여행을 가실 때 금일봉을 두둑이 챙겨 드리거나, 가족 식사 시 망설임 없이 카드를 내밀 수 있는 것들 말이다. 큰 나무의 그늘은 깊다고 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 부부가 가족의 큰 나무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앞으로도 가지를 쭉쭉 뻗어 가족들이 쉬어갈 수 있는 깊은 그늘을 잘 유지하면 좋겠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PublicDomainPictures님의 이미지입니다>

쓰다 보니 에피소드들이 화수분처럼 생각이 났다.

더 써볼까? 아니야, 중간만큼 썼다 마무리 못했던 글들이잖아.

욕심을 버리고 여기까지!


앞으로는 HR 업무, 특히 해고 업무를 하며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좀 써보려고 한다. 결이 다른 이야기로 기존 구독자분들의 취향을 저격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도전은 계속될 예정이다.


브런치 첫 시작을 응원해 주시고 찾아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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