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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Apr 11. 2024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채식하는 마음

중간의 일탈이 모든 걸 망치진 않는다!

역시 쉽지 않았다. 태어난 이래 몇십 년 동안 이어온 식습관을 한 번에 바꾸는 건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호기롭게 볼 게 아니었다.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 건 몇 주 전 선언한 채식을 순탄히 이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만 나는 것처럼, 채식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여느 때보다 훨씬 더 육고기를 자주 먹게 되는 건 대체 무슨 일이람? 상황을 원망해 봐야 나아질 건 없다. 상황은 똑같고 그 안에서 흔들리는 건 내 마음뿐이니.


채식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후 한 2주간은 보통의 식사 패턴으로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오트밀과 견과류로 직접 만든 그래놀라와 바나나 한개를 먹었고, 점심 때는 집밥을 먹었다. 집에서 먹는 식사는 대체로 채소로 만든 반찬인 경우가 대다수나, 간간이 아빠가 좋아하는 돼지 김치찌개가 올라올 때도 있었고 돈까스나 달걀 장조림이 올라올 때도 있었다. 앞선 글에서 거듭 이야기했듯 나는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깜냥이 안되기 때문에 이럴 땐 고분고분히 먹되, 육류 반찬을 자발적으로 내 식탁에 올리려 하진 않았다. 저녁은 때마다 달랐는데 초기에는 감자와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을 구워 먹었고 힘이 달릴 땐 닭안심을 구워 넣은 샐러드를 먹기도 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순댓국을 먹을 때도 있었고, 어떨 때는 소고기와 치즈가 듬뿍 들어간 퀘사디아를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먹으라고 협박을 한 건 아니니 내 의지가 들어간 셈이다. 핑계로 콩으로 먹는 단백질이 물렸고, 내 몸이 동물성 단백질을 원하니 어쩔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대체로 이런 식사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 갑자기 순댓국이 땡겨서 먹었고, 약속 장소가 마침 타코 가게였기 때문에 으레 퀘사디아를 주문하는 식이다. 나중엔 그나마 정신을 차려 빵은 절제하고 커피는 아메리카노로 마시긴 했으나... 찜찜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생활을 같이하는 부모님이나 만나는 지인들에게 채식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모님의 경우엔 집에서 먹는 식단으로 이미 육류 소비를 자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거기에 대고 '이건 완전한 비건이 아니니 의미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또한 누구에게라도 채식을 한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왜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됐느냐"라고 묻는데, 거기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댈 수 없기도 했고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묘한 의무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나는 불필요하고 과도하게 죽어가는 동물들을 살리는데도 관심이 있고, 점차 인간이 살 수 없는 생태계가 되어가는 걸 막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만.. 채식을 해도 충분히 인간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채식만으로 충분히 맛있고 멋진 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복잡다단한 마음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일면일 뿐. 결국 중요한 건 중간에 몇 번 꺾이더라도, 그게 외부의 시선이든 내부의 무의식 때문이건 꺾여도 그냥 이어가는 마음이다. 어차피 시작할 때 하루아침에 완전한 비건이 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이 모든 것들은 과정이다. 망한 걸 그냥 포기하자고 하기보단 다른 걸 먹었으니 오늘은 채식에 더욱 중점을 둬보자 하는 마음이 내가 갖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내 무의식도 알아서 채소로 손이 갈 때가 있겠지 하는 믿음. 채식에 도전하셨던 많은 분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가셨으리라 생각하니, 나만의 죄책감이나 자괴감으로 남겨두진 않으련다. 이걸 보시는 분들 중 나와 같은 시기를 거쳐가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여기 저도 힘들어하고 있답니다! 저도 실패했답니다! 방방 뛰면서 손을 흔들어 드리련다. 조금의 일탈이 우리 전부를 망가뜨리진 않으니, 오늘도 다시 마음 잡아보렵니다!


이 정도의 외식 메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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