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Mar 25. 2024

오이는 단무지처럼요

왜 오이를 썰지 못하니?

2024. 3. 24.

<사진 임자 = 글임자 >


"오이는 어떻게 썰면 돼?"

"단무지처럼."

"오이를 왜 단무지처럼 썰어?"

"단무지 대신 넣을 거니까."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

"왜 오이를 그렇게 써냐고?"

"단무지 대신이니까."

"진짜로 그렇게 썰어?"

"그럼 가짜로 그렇게 하리?"


손발이 맞아야 김밥도 싸지, 그냥 썰어 달라는 대로 썰어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건가? 그러나 맹세코 내가 먼저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뭐 도와줄까?"

"안 도와줘도 돼. 피곤하다며 가서 쉬어.(=그냥 방에서 쉬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그냥 나 혼자 해도 돼."

"내가 해 준다니까."

"피곤하다니까 그러지.(=그냥 가만히, 조신하게 있어주는 게 가장 나를 도와주는 거야)"

"당근 그거 썰 거야? 내가 해 줄게."

"그럼 그러시든가."

"얼른 줘."

"일단 껍질 벗기고 난 다음에."

"빨리 줘."

"재촉 좀 하지 마. 줄 때 되면 다 줄 테니까."

"얼른 줘야 썰지."

"그냥 안 해줘도 된다고.(=그렇게 재촉할 거면 차라리 나서지 마.)"

"내가 썰어 줄게."

왕년에 김밥에 넣을 당근 좀 썰어 본 그 양반은 당근부터 덥석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그 양반은 나름 뭔가 같이 해 보겠다고 덤비는데 재촉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

그래서 차라리 그냥 나 혼자 조용히 하고 싶은 거다.

한번 재촉하기 시작하면 사람을 달달 볶아버린다.(고 나는 자주 느꼈다. 그런 그의 성미가 달갑지도 않다.)

내가 무슨 야채도 아니고 왜 자꾸 못 볶아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당근은 다 썰었고 이제 뭐 하면 돼?"

"그냥 안 해도 돼."

"오이 이건 뭐 할 거야?"

"김밥에 넣을 거야."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썰면 되지."

"어떻게?"

"단무지처럼 썰어. 그냥 오이 넣으려고 이번엔 단무지를 안 샀어."

"그렇게 해서 어떻게 김밥을 싼다는 거야?"

"단무지처럼 썰어서 넣음 되지."

"그럼 싸기 힘들잖아?"

"그게 왜 싸기 힘들어?"

"반달로 썰면 어떻게 김밥을 싸?"

"아니 왜 오이를 반달로 썰어?"

"단무지처럼 썰라며?"

"그래. 단무지처럼 썰면 돼. 근데 거기서 반달이 왜 나와?"

"중국집 단무지 생각했지. 거긴 반달로 나오잖아."

"뭐? 내가 지금 뭘 만들려고 하고 있지? 김밥 만든다고 했잖아. 근데 거기 들어갈 단무지를 안 샀으니까 그 대신 오이를 넣겠다고 했잖아. 그럼 기본적으로 김밥 속에 넣을 오이를 어떻게 썰어야겠어? 당근처럼 길게 썰어야겠어? 아님 반달로 썰어야겠어?"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는 거야. 왜 김밥 싸는데 반달로 오이를 썰라고 하는지."

"생각을 해 봐. 기본적으로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다 길쭉하지 않아? 근데 여기서 중국집 반달 단무지가 왜 나오냐고?"

"단무지처럼 썰라고 해서 그런 거지. 나는 반달 단무지를 생각했지."

"어떻게 김밥 싸는 재료 얘기하면서 반달로 오이를 썰 생각을 다 했는지 진짜 신기하다.

나는 반달 단무지의 'ㅂ'조차도 생각 못했는데.


김밥 싸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취지는 좋았으나 내 말을 너무 못 알아들었다.

내가 찰떡을 쑥떡같이 말을 한 건가?

아니면 찰떡을 그 혼자 쑥떡이라고 착각한 건가, 과연?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 양반에게는 세상에 두 종류의 단무지가 있다.

반달 단무지와 길쭉한 단무지.

나는 다짐했다.

이왕이면 그 양반의 레이더망을 피해서 남몰래, 조용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김밥을 싸야겠다고.


작가의 이전글 만만치가 않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