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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23. 2024

잿밥 완전 좋아요

염불과 잿밥이 있는 저녁

2024. 3. 17.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얘들아, 아빠 없어도 엄마 말 잘 듣고 잘 있어. 잘할 수 있지?"


걱정할 걸 걱정하시구려, 당연히 잘하지.

있어도, 없어도, 잘하고 말고.

우리 애들은 쉽게 동요되지 않는다고.

그저 당사자만 잘하고 계시면 그만이라고.

이런 걸 고급 전문용어로 '걱정도 팔자'라고 한다지아마?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서 각자 하던 대로 살면 아무 탈 없다.


"아빠 출장 간다."

출장 하루 전날 직장인이 우리 세 멤버 앞에서 다시 알려줬다.

나는 생각한다.

두 글자로 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감히 '출장'이라고.

엄마보다, 사랑보다, 어쩌면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출장이 다 이긴다.

굳이 겨루기를 하지 않아도, 생각만으로도 미소 짓게 만드는 단어는 단언컨대 바로 그것이다.

주위의 제보에 의하면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최소한 아내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출장'일 것이다.

기원전 3,000년 경에 경험해 본 그 소중한 것은, 이젠 다시 경험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출장도 남의 출장이 더 재미있어 보인다고(당사자에겐 재미 같은 게 전혀 있을 리는 없겠지만) 이 봄날에 바깥바람 쐬는 그 직장인이 업무 차 떠나는 것이란 걸 잠시 깜빡했다.


직장인은 출장을 가고 나머지 세 멤버는 집에 남았다.

아빠가 없어도 아이들의 일상은 평소대로 잘~ 돌아갔다.

"얘들아, 혹시 바쁜 일 있어? 바쁜 일 없으면 쪽파 좀 다듬어 줄래?"

"엄마가 원한다면 도와줘야지."

"할 일은 다 했어? 쪽파 다듬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너희 할 일이 먼저야. 알지?"

"알았어요."

"엄마는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그거 먼저 다 하고 같이 할게. 집안일은 원래 가족들이 다 같이 하는 거니까."

"근데 엄마, 그냥 하면 심심하니까 노래라도 듣는 게 어때?"

"들어야지.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면 좋잖아."

"그럼 우리가 고를게."

딸과 아들은 심혈을 기울여도 너~무 심혈을 기울이셨다.

한 명이 이 노래를 고르면 다른 한 명이 제지하고 나섰다.

이러다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첫 선곡을 하는 데만도 5분이 넘게 걸렸다.

어라?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후딱 듣고 싶은 노래 골라서 쪽파 다듬는 일에 본격적으로 투입돼야 하는데.

"그런데 너희 어째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잿밥이 뭔데?"

"부처님 앞에 올리는 밥인데, 염불을 할 때 놓는 밥이거든. 엄마도 잘은 모르지만 염불이 끝나면 잿밥을 먹나 봐."

"우린 잿밥 안 놨는데?"

"그게 말이 그렇단 거야. 불공을 드릴 때 염불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그보다 잿밥에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거든. 한마디로 정작 정성 들이고 신경 써야 할 일에는 건성이고 다른 일에만 온통 관심을 보인다는 뜻이지. 너희가 지금 약간 그런 것 같아서. 쪽파가 염불이라면 노래는 잿밥인 셈이랄까. 쪽파 다듬어 준다고 해놓고 노래 고르는 데만 정신이 집중돼 있는 것 같아. 아마 엄마가 혼자 오해한 거겠지? "

"오해야, 엄마. 우린 염불에도 관심 있고 잿밥에도 관심이 있는 거야."

"그래도 살짝 잿밥이 더 좋긴 하지?"

"그렇긴 하지."


초등생 남매에게 염불에만 집중하기를 바란다는 건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동안 남매의 행동을 보면 염불도 아주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그 염불 외는 일을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뿐인 거다.

한 멤버는 없었지만 그날 나머지 세 멤버는 염불도 잘 외고 잿밥도 야무지게 잘 챙겼다.

없는 멤버가 걱정한 만큼은 아니다.

우리 집은 잘만 돌아간다.

잘도 도네,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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