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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Apr 23. 2024

[職四] 상무님은 숫자로 죽인다

직장인의 사계 - 여름 [숫자는 회사에서 쓰는 가장 기본적인 언어]

  회사에는 임원분들이 계십니다. 저희끼리 우스개 소리로 임시직원 주제에 감히 정직원한테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웃어넘기고 말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오늘은 여러 상무님을 모시면서 제가 느낀 이분들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기본 태도를 잠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나누고 싶은 내용은 호칭은 다르겠지만 필연적으로 함께 해야 할, 나의 결재 라인에 들어있는 직속상관인 '상무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게임으로 말하면 이 분들은 끝판왕으로 가기 전에 있는 각 스테이지를 통과하는 관문을 차지하고 있는 중간 보스입니다. 끝판왕만큼 세지는 않지만 여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끝판왕에게 가지 못 하니 결재라인을 타는 와중에 필히 지나쳐야 하는 분이지요. 이 분을 통해 본인의 기획안이나 결재문서가 CEO에게로 가고, 그 과정에서 결재를 반려하실 수도, 코멘트를 다실 수도 있으니 그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요.


  이분들은 직장생활을 꽤나 오랜 시간 하셨습니다. 보통 20년 이상의 직장생활 경험이 있으시고, 보수적인 기업에서는 대부분 30년에 가까운 경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신입사원이 임원으로 승진할 확률은 2011년 0.95%에서 2021년 기준 0.76%까지 떨어졌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이니 100분의 1 이상의 어려운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조직 내의 실력자들이시지요. 


  기본적으로 상무, 즉 임원이 되었다는 건 실력은 검증이 되었다는 얘기며 그 외에 대인관계 등 나름의 주특기들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또한 직장의 별을 단 그분들은 하늘에서 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여러 운이 합쳐져 비로소 이무기에서 용으로 거듭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방향성을 떠나 나름 치열하게 직장생활을 하신 분들이긴 합니다.

  

  세상에는 직원들을 힘들게 하는 상무님도 계시고, 때로는 정말 이상한 상무놈도 존재한다는 건 뭐 어쩔 수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에겐 한 칼이 있으니 항상 이를 명심하고 조심하는 게 좋겠지요. 적어도 나의 진급이나 인사 관련 사항에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얼마든지 엿은 퍼다 먹여 주실 수 있는 막강한 을 지닌 분이라는 걸 항상 유념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이런 별을 단 상무님들과 회의를 하거나 보고를 하다 보니 이분들이 '숫자'에 민감하시고 계산이 빠르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실이 얼마나 발생하냐?', '조업도가 올라가면 얼마나 손익으로 반영되냐?', '하루 가동을 쉬면 얼마나 손실이 발생하나?', '판관비를 얼마나 줄여야 BEP 달성하냐?' 등 질문의 형태도 대부분 숫자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수첩, 태블릿, 휴대폰 등에 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한 커닝 페이퍼를 가지고 다녀야 이런 질문공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치 빠른 중간 관리자들은 웬만한 숫자는 다 암기하고 즉문즉답을 하는 모범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들도 임원이 되기 위한 수련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여기저기 커닝 페이퍼를 준비해서 다니곤 합니다. 자료가 많아진 요즘은 50여 페이지의 책자로 만들어서 다이어리와 쌍을 이루어 모시고 다니곤 합니다. 자주 대답한 숫자는 머리가 아닌 입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분들은 자주 숫자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곤 합니다. 그분들에게는 사람도 숫자, 조직도 숫자, 제품도 숫자인 것 같습니다. 회사의 존재 이유가 이윤추구이니 뭐 당연한 진화겠지요. 그에 부합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거나 숫자로 사고할 수양이 부족한 사람들은 조직의 99%가 되어 그렇게 별이 되지 못하고 별똥별이 되어 다른 길로 가시곤 합니다. 


  그러니 회사 생활에 있어 숫자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모든 보고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숫자일  나머지는 다 숫자를 설명하기 위한 장식품일 뿐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얼마를 써서 얼마를 벌 수 있냐'가 회사에서 항상 귀결되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에 맞춰 진화해야 합니다. 숫자만 생각하라는 게 아니라 늘 숫자의 관점에서 점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100만 원짜리 판촉물을 만듭니다. 웬만한 크기의 기업이면 큰 무리 없이 결재를 받을 금액이지요. 하지만 결재를 올리기에 앞서 이로 인한 기대효과가 대략 어느 정도 될지, 혹은 판촉물을 제공하는 대상의 매출액이나 이익이 어느 정도 인지는 사전에 슬쩍 보는 센스가 필요합니다. 안 물어보시면 다행이겠지만, 물어봤는데 꼭 외워서가 아니더라도 수첩을 보며 정리한 내용을 보고하는 모습에 속으로 미소 짓지 않을 윗분들은 안 계십니다. 위로 갈수록 더 심한 건 자명한 사실이구요. 


  그러니 늘 본인에 관련된 숫자는 기억하거나, 기억에 둔한 분이라면 잘 보이는 곳에 적어 두시길 추천합니다. 다이어리 맨 앞 페이지에 적는 것도 좋구요. 운영계획 매출 숫자, 내게 할당된 거래선의 목표 숫자, 수율 계획, 판관비율 등 연초에 한 번 공부하고 기록해 두면 요긴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한 번씩 훑어보고 시작하시면 금방 외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회사에서는 숫자와 친해지시길 권해 드립니다. 




  오늘도 상무님은 숫자로 죽이십니다. 이제 갓 팀장이 되어 아직 이런 선문답에 익숙하지 않은 옆팀 팀장은 오늘도 탈곡기가 곡식을 털듯이 탈탈 털립니다. 이 숫자 저 숫자 꺼내실 때마다 얼굴이 노래지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동료가 안쓰럽네요. 어떻게 저런 것까지 물을 수 있나 할 정도로 집요하게 숫자로 푸닥거리를 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짬밥이 낮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혹독한 방법으로 갓 태어난 아기새를 조련하는 것이겠지요. 회사에서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아기새의 머리가 다 벗어질 만큼 부단히도 쪼아 대네요. 어쩐지 옆팀 팀장의 머리숱이 자꾸만 적어지는 것 같아 짠한 맘이 들지만 어찌하겠습니까 회사에서는 숫자가 진리인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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