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완 Jan 17. 2024

헤어진 엄마 아빠에게도 사연은 있다


엄마 아빠에게 받은 상처는 오랜 시간에 거쳐 서서히 새겨졌다. 열세 살때부터 스물 두살때까지 부모님의 싸움이 이어졌으니 거의 1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그러나 그 기간동안 나는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늘 엄마 아빠가 드잡이를 하고 있는 집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드러나면 어쩐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는지 묻는다면,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말을 꺼내는 순간 어렵게 붙들고 있던 끈이 끊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당시엔 어떤 것도 감각하지 못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생존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사춘기와 이십대 시절을 부모의 보호없이 살아내야 했기 때문에 치열하게 생활해야 했다. 고등학교 땐 대학에 가야했다. 대학 땐 등록금을 내기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했고 생활비를 위해 과외를 해야했다.


상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나는 늘 그자리에 있었다. 상처의 통증은 서른이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10년의 시간을 건너온 상처는 나를 다시 고통스러웠던 십대와 이십대로 끌고 들어가곤 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내가 상처를 들여다볼 여력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내게도 안심할 수 있는 가족이 생겼다. 그래서 상처를 들여다봐도 덜 아플 수 있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뒤늦게나마 엄마와 아빠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물론 엄마 아빠가 지닌 고유한 성격이 삶을 그렇게 만들었을지라도, 그런 선택을 할만한 이유는 존재했을 거라 믿었다.


굳이 파헤치려한 건 아니었는데 살면서 언니와 동생에게서 조금씩 듣게 됐다. 언니와 동생이 기억하는 엄마 아빠, 그리고 부모님이 무심코 언니와 동생에게 했던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야기를 모아 엮으니 어느 정도  부모님의 전사(前史)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는 어릴 적 한 동네에 살았다. 엄마의 집은 동네에서 꽤나 부자였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아들 없는 부잣집에 입양된 아들이라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다.

아빠는 가난한 농부의 막내 아들이었다. 위로는 9명의 형과 누나들이 있었다. 엄마의 오빠, 즉 나의 외삼촌과 아빠는 친구 사이였다. 성인이 된 아빠는 엄마를 보고 반했다. 외삼촌에게 엄마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둘은 만났고 불이 붙었다. 외갓집에서는 반대했지만 엄마는 가출을 감행했다. 아빠와 동거해 언니를 가지고 나서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진하게 사랑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아빠가 군대에 가서였다. 아빠는 세 명의 여자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바람을 피웠다. 엄마가 둘째인 나를 낳았을 때는 다른 여자와 나가 살림을 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여자와 헤어지고 돌아왔다. 왜 그 여자와 헤어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의 기억에 의하면 아빠의 등에는 손톱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아빠의 바람을 알게 된 후 엄마는 이혼을 하려고 했지만 어린 두 딸을 두고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담배를 배웠다. 나는 어렸을 때 종종 엄마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간호학과를 나와서 보건소에서 일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빠는 애들을 키우라며 그러지 못하게 했다. 엄마는 일을 하지 않고 온전히 가족을 위해 젊은 시절을 바쳤다.


아빠는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웠던 젊은 시절 이후 꽤 오랫동안 한눈팔지 않았다. 벌어온 돈을 엄마가 저축하지 않고 몽땅 사교육비와 생활비로 써버려도 참았다. 엄마가 돈을 못 벌어온다고 구박해도 견뎠다. 다시 여자를 만나기 시작한 건 나이 마흔 중반이 넘어서였다. 고시원을 차리느라 많은 빚을 졌는데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집에 가면 엄마가 늘 돈 얘기를 했고, 사춘기 딸들과는 멀어졌다. 춤을 추러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여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가 춤을 추러 다니며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알자 분노했다. 이미 과거에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다. 의부증이 생겼다. 늘 아빠를 의심하고 감시하고 들볶았다. 아빠를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아빠는 정확하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절대 그러지 않았다고 잡아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딸들은 엄마 편을 들었지만, 엄마가 우울증이 심해지고 술을 마셔대자 상대적으로 가정적인 아빠 편을 들기 시작했다. 엄마는 겉잡을 수없이 망가졌다. 아빠는 승리했지만, 이혼 후에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


엄마에게도 이유는 있었고 아빠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부잣집 딸이었던 엄마는 아빠의 경제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늘 무시하고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빠는 그런 엄마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바람을 피웠다.


이유를 따지고 보니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용서는 잘 되지 않는다. 이해와 용서는 다르다. 이해는 머리의 영역이지만 용서는 가슴의 영역이다.


꽤 오랫동안, 나는 엄마 편을 들어주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가졌다. 엄마 얘길 하면 항상 눈물이 났다. 아주 나중에서야, 나는 나를 용서했다. 아빠가 바람을 피운다는 이유로 자식들을 두고 떠난 엄마도 나에게 상처를 준 것임을, 내가 나를 보듬어줘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건강해져야 한다. 내가 나를 먼저 위로하고 보듬어줘야 한다. 상처가 아물면, 마음이 건강해지면 나도 미움에서부터 자유로워져 더는 아프지 않게 될 거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이상한 아내가 될지도 몰라(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