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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lli Apr 18. 2024

걸어서 티베트까지, 이곳은 해발 5,233m

매리설산 북파 트레킹 02

https://brunch.co.kr/@curiousx/19


(전편에서 계속)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강풍에 몇 번씩 잠을 깨며 맞이한 아침, 드디어 첫번째 야코우를 넘는 날이다. 포쥔 야영지에서(4,150m) 츠딩 야코우(次丁垭口, 4,770m)를 넘어 포쟝 야영지(坡将营地, 4,200m)까지 가야 한다.


말이 갈 수 없는 곳이라는 말에 대충 난이도는 짐작이 되었다. 티베트 지역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인 말은 짐을 싣고 오래 걷는 상황에서는 최고의 파트너지만 눈이 쌓인 급경사에서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뜻은 곧 오늘 우리가 오를 길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예고. 마부는 말과 함께 길을 우회해서 포쟝 야영지에서 우리를 만나기로 했다. 오늘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스스로의 루트 파인딩 실력과 적당한 감에 의지해서 가야 한다. 


첫번째 오르막부터 아찔한 구간이다. 트레킹 길이라고 하기보다는 현지인들이 다녔던 흔적이 있는 소로인데 경사가 급한 데다가 길이 상당히 좁고 바로 옆은 낭떠러지였다. 이런 구간에서는 무엇보다 집중력이 중요하다. 발 디딜 곳을 차분히 살피며 한걸음씩 올라 드디어 능선 구간에 올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능선에 오르자마자 몰아치는 세찬 눈보라로 한걸음조차 움직일 수 없다.  처음에는 스틱으로 무게중심을 잡은 후에 그 자리에서 강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바람이 더 거세지면서 자세를 낮춰 주저앉았다. 그렇게 힘겹게 몇 걸음 가고 멈추고, 몇 걸음 가고 몸을 낮추기를 반복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설원이 펼쳐졌다. 


설산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몽롱함을 느끼곤 한다. 춥고 힘들고 두려운 상황이어야 맞는데 오히려 극도의 행복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유를 찾기 힘든 근원적인 행복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이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고, 그저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행복인지 고통인지 모를 경계가 없는 길을 걷다가 우리는 길을 잃고 말았다. 눈앞에 여러 개의 야코우가 펼쳐져 있는데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이 서로 이쪽으로 올라오라고 우리를 재촉하는듯 싶었다. 결국 몇 개의 능선에 올랐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아무리 주위를 돌아봐도 눈부신 설원과 은빛 봉우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아주 멀리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동충하초를 캐러 올라온 한 분이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것. 저쪽으로 가야 한다며 소리를 질러 알려주었고 성산의 메아리 덕분에 간신히 의사소통에 성공해서 결국 츠딩 야코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부는 츠딩 야코우에서 휴대폰 신호가 잡히니까 거기서 꼭 자기한테 연락하라고 했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무사히 야코우에 도착했다는 문자만 남기고 내려오는 길, 하산길 경사가 심해서 고생했다. 마부는 움막촌 어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를 왜 받지 않았냐며 타박하려했지만 만나는 순간 그냥 눈물나게 반가웠다.


길을 잃었던 지점



4일차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띠엔쟝 야코우(滇藏垭口,5,233m)를 넘어 티베트 땅을 밟는 날이다. 어제 산행이 너무 고되었는지 얼굴은 팅팅 붓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을 위해 오랜 시간 기다리고 며칠을 걸어왔지만 막상 오늘이 되니 어떤 핑계거리를 찾아 그냥 움막에 머무를 방법은 없을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솔직한 고백이다.


움막촌을 벗어나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쯤 4일만에 처음으로 현지인이 아닌 외부인(?)을 만났다. 우리의 방향과 반대로 티베트 지역에서 띠엔쟝 야코우를 넘어온 중국인 트레커였다. 한국인인 우리는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다. 


첫번째 능선에 올라서니 마부 스눠원디가 이제 본인은 내려가겠다며 우리를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옆으로 가면 큰일나니까 조심하라고 한다. 아니 그게 그렇게 가벼이 건넬말인가. 여기는 해발 4,500m, 핸드폰 신호는 당연히 없을뿐더러 4일만에 사람 한 명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란 말이다. 우리는 어제도 산에서 길을 잃었단말이다. 작년 겨울 단독으로 산에 들어갔던 두 명이 조난당해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갑자기 생각났다. 심장이 쿵쾅댔지만 그렇다고 스눠원디를 꼬셔서 같이 가자고 조르자니 면이 서지 않았다. 


세명이 서로 끝없이 펼쳐진 봉우리들을 향해서 손가락을 가리키며 “저기?” “아니 그 옆에” “그럼 저기?” “응 거기” 이런 식으로 무식하게 소통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곳에 비록 통신 신호는 없지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생각해내고서 저 앞에 아득히 보이는 능선을 몇 개 찍은 후에 최대한 확대시켰다. “아, 여기!”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인사와 함께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침에 흐렸던 날씨는 맑아졌고, 하늘은 청명했으며 조용한 침묵 속에서 내 호흡 소리만 들렸다. 어제와 달리 오늘 오르는 사면은 눈이 없었는데 작은 자갈들이 흘러내리는 구간이라서 오히려 걷기에 힘들었다. 장엄한 설산의 파노라마 속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 나는 이 성산의 품안에서 이 오랜 시간을 지켜온 발 밑의 자갈들보다 더 작디작은 먼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상을 앞에 두고


마침내 마주한 정상 띠엔장 야코우(5,233m). 바람에 나부끼는 타르쵸를 마주하니 방금 전까지 쓰러질 듯 힘들었는데 어디선가 새 힘이 솟아올랐다. 그 기운으로 폴짝폴짝 뛰다가 티베트 쪽으로도 조금 걸어가보았다. 지상보다 밀도는 낮지만 순도는 더 높을 듯 싶은 티베트의 공기도 맘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짜시델레, 짜시델레’ 산을 향해 기도를 올린 후 하산을 시작했다. 


중국 윈난성과 티베트의 경계, 띠엔쟝 야코우


다시 포쟝 야영지로 돌아왔을 때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밥생각도 없고 그저 시원한 음료한잔만 마시면 기운이 날 것 같았다. 간절한 마음에 동충하초를 캐러 온 마을분들께 물었더니 음료수는 있지만 파는 것은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본인들 먹어야 하니까 팔지 못한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냥 가져가는 것은 괜찮지만 돈을 받지는 않겠다’ 라는 뜻이었다. 여러개의 음료수를 우리에게 건네셨지만 사례를 안 받으시니 죄송스러워서 그냥 레드불 한 캔만 받아왔다. 


예전에 티베트 라싸, 시가체, 장체 지역을 여행할 때 생각이 났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불편을 겪을 때마다 현지 티베트분들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도움을 주었다. 표를 대신 사주고, 음식을 나눠주었다. 돈은 절대 받지 않았고, 대신 내 물건을 드리면 그것은 받았다. 이번에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국 라면과 참치캔을 전해드렸다. 지금은 동충하초 마지막 시즌, 땅에 엎드려 기다시피 고된 노동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귀한 선물들이 이분들의 눈 앞에 한가득 나타나 주길 빌었다.



마지막 다섯째날, 어제부터 눈상태가 안 좋더니 결국 설맹이 온 듯싶다. 눈은 뜰 수 없을 정도로 붓고 계속 눈물이 났다. 눈이 안 떠지니 시야가 막히고 고개를 위아래 좌우로 돌려야만 비로소 평소의 시야가 확보되는 상황, 눈에 뵈는 것이 없으니 용감해지다가 눈물이 계속 흐르니 우울해졌다. 오늘 과연 야공촌 마을까지 잘 돌아갈 수 있을까, 훌쩍.


4박5일간 야영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식량도 간소하게 준비했고, 취사도 용이하지 않다 보니 사용한 에너지에 비해 먹은 것이 적었다. 미리 훈련을 하지 않고 급하게 온 탓에 축적된 체력에 비해 운동량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체력이 소진된 상태인 것인데 그냥 계속 춥고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쩍.


엄살을 피우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이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노하우, ‘나는 오늘 저녁에는 따뜻한 쌀밥에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실 수 있다.’ 라고 말해주기. 마지막 남은 쵸코바 한 개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스스로를 채찍질해보았으나 체력은 거의 방전된 상태,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너무 멀고 힘들었다. 


산허리를 깎아서 길을 내었고 평소에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은 길이었기에 긴장하고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해가 지기전에 출발했던 야공촌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출발할 때 축복해주었던 마을 분들이 다시 환하게 축하해주었다.




지금까지 다녀온 산행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행복하고 감동적인 여정이었다. 티베트인들에게 산이란 오르는 대상이 아니라 섬기는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산인 매리설산 등정은 금지되어 있으며 이 지역에서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도 금기시된다. 경건하게 손 전체로 가리켜야 하는 것. 


첫 티베트는 베이징에서부터 48시간을 기차를 타고가서 만날 수 있었고, 이번에는 5일간 산을 걷고 넘어서 만났다. 그런데 이제는 육로로 티베트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 한다. 조만간 다시 배낭을 꾸려야겠다. 티베트의 경계가 아닌 티베트의 중심에서 산에 오르는 날을 준비해야겠다.




[매리설산 북파 트레킹] 영상으로 보기

https://youtu.be/U001qMXrw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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