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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봇 Apr 20. 2024

장례식장에서 파티를 했다

늦은 밤 남편은 충격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삼촌이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미군이셨던 삼촌은 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했고 한국에서도 군복무를 하셨던 분으로, 한국 생활을 막 시작한 남편에게 침대가 없으면 ‘요’를 깔고 자라며 적극적으로 한국 생활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다. 5년 전에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며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지역으로 이사하셨는데, 그곳에서 재혼에도 성공하시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리도 갑자기 가시다니 가족들은 허망함에 모두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삼촌의 장례식을 어떻게 할 건지 가족끼리 회의가 열렸고, 고향이 아닌 삼촌이 최근까지 살던 지역에서 하기로 결정되었다. 거리가 조금 있어서 가족들은 각자 비행기를 타고 장례식이 열리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남편은 엄숙한 일반 장례식과는 다른 형태로 진행될 거라 편안한 복장으로 가도 된다고 했지만, 엄연한 장례식에 아무 옷이나 입고 간다는 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남색 옷을 입고 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렌터카를 타고 알 수 없는 건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고인이 되신 삼촌의 부인, 그리고 검은색 가죽조끼와 부츠를 신고, 할리 데이비슨 같은 엄청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오토바이 부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설명을 듣지 못했기에 장례식에 무슨 폭주족이라도 온 건가 싶었는데, 이게 웬걸. 오토바이 부대가 우리 가족들이 탄 차량을 에스코트하며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들은 미군이자 참전용사였던 고인의 가는 길을 함께 하고자 온, 지역 재향군인 단체였다. 장례식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의 거수경례가 이어졌고 그렇게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식장은 일반적인 미국 장례식장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정집 앞마당이었다. 조문객들 또한 슬리퍼에 흰 티 같은 정말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고, 고인의 직계 가족들은 모두 하늘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자리했다. 어두운 옷을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앞마당에 놓인 간이 의자에 조문객들이 착석하자, 고인의 형제들과 친구들이 그와 관련된 추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고인이 피검사가 무서워서 울며 도망간 일화라던가 매일 같이 농구하다가 다쳐서 가정 폭력을 의심받은 부모님이 경찰에 불려 갔다던가 하는 소소하고 웃픈 옛이야기들 말이다. 그렇게 고인을 추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모두 본격적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집은 고인의 집이 아닌 고인 친구의 집으로, 뒷마당이 호수와 연결되어 있는 경치가 정말 아름다운 집이었다. 분명 고인이 이 지역에 처음 올 때는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혈혈단신이었다고 들었는데, 기꺼이 자신의 집을 장례식장으로 쓰도록 내줄 만큼 가까운 사람들을 이곳에서 많이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생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느껴졌다. 


집 안 TV 모니터에는 고인의 20대부터 현재까지의 사진들이 영상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거실과 테라스에는 술과 음식이 있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가져다 먹을 수 있었다. 분명 장례식인데 곡소리는커녕 모두 웃고 즐기고 떠드는 소리가 집 안을 매웠다. 영화에서 보던 일반적인 미국식 홈파티와 다를 게 없는 형태였다. 아무리 살아생전 유쾌했던 고인이었기에 파티 형식의 추모를 한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이 이렇게까지 웃고 즐겨도 되나 싶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어느 정도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고인의 아내가 큰 상자를 하나 들고 왔고, 가족들만 그 상자를 들고 집 뒤편 호숫가로 이동했다. 상자 안에는 이제는 하얀 가루가 되어버린 고인이 들어 있었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호수에 그를 뿌리는 데, 그제야 그간 참았던 눈물이 터지는지 모두들 티셔츠로 연신 눈가를 닦아냈다. 슬프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고인을 위해 슬프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눈물이 그친 뒤에도 갑자기 간 형제를 보내는 그 찹찹한 마음은 그들의 얼굴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미소를 띄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본 후, 이 파티 형식의 장례식은 사실 고인을 위해서라기보다,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인의 성격상, 아무리 자기 장례식이라도 사람들이 울고불고하는 것보다는 자신과의 추억을 더 많이 기억하고 얘기하기를 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이런 파티 형식의 장례를 택한 것이다. 남은 사람들 또한, 자연스럽게 고인과의 추억을 웃으며 나눌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을 조금은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남편은 일 때문에 바로 그날 밤 비행기로 돌아갔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곳에 더 머물 거라며 호텔을 잡았다. 아마도 고인이 지냈던 지역을 여행하며 그를 더 추억하기 위해서리라. 이번 장례식을 보며 세상에는 다양한 추모 방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추모 방식은 다 제각각이더라도 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도 말이다. 파티가 아니라 모두 슬픔을 이겨내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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