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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킨스데이 Mar 14. 2024

뉴질랜드 슈퍼마켓에서 마주한 K-푸드의 실상

K-컬처의 매력에 빠진 뉴질랜드 사람들

  

  9년 전, 워싱턴 DC에서 근무하고 있던 시절이다. 교회 언니의 차를 얻어 타고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한인 마트인 H마트에 처음 갔었다. 이마트보다 더 큰 규모였는데 한국에서도 보지 못했던 온갖 한식 재료와 각종 냉동, 냉장, 상온식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저 생존해야겠다는 굳은 의지로 쇼핑 카트를 가득 채웠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현지 슈퍼마켓에서는 한식 제품을 찾아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한 때 식품 마케팅을 했던 직업병 때문인지 해외여행을 가면 슈퍼마켓을 꼼꼼하게 둘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신제품을 출시했을 당시에는 그렇게 마트 다니기가 지겨웠는데 지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어떤 식재료가 있고 어떤 브랜드가 매대를 차지하고 있는지 자발적으로 시장 조사를 하고 다닌다. 뉴질랜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뉴질랜드를 매년 1회 방문하면서 뉴월드, 카운트다운, 팩 앤 세이브 등 지역별로 현지인이 애용하는 로컬 슈퍼마켓 체인점을 돌아다니고 있다. 5백 만의 작은 인구지만 다인종 이민자 사회인 뉴질랜드의 슈퍼마켓은 어떤 모습일까?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먹고살까? 자, 나와 함께 구경해 보자.


카운트다운 슈퍼마켓 입구 전경 (이미지 출처: NZ Herald Belinda Feek)


무포장의 신선한 제철 채소와 과일

  입구에 들어서면 과일과 채소 매대가 가장 먼저 소비자를 맞이한다. 제철 식재료가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는 코너이다. 나는 올해 여름에 도착해서 가을에 접어드는 시점에 있는데 처음에 체리가 반짝 나왔다가 사라지고 블루베리와 수박, 스위트콘, 복숭아가 매대를 차지하더니 이제 끝물에 접어들었다. 가을이 키위의 계절이라고 들어서 제스프리 키위가 저렴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사과 대란이라는데 여기서도 혹스베이 지역의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사과 농사가 잘 안 돼서 오클랜드의 슈퍼마켓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녹색 사과 Granny Smith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타우랑가의 슈퍼마켓에서는 판매를 하고 있어 몇 개를 골라 담았는데 품질이 예전 같지 않고 가격도 오른 느낌이다. 못난이 농산물은 "ODD Bunch"란 브랜드로 최대 50%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 채소와 과일 매대에는 대부분 낱개 구매가 가능하다. 슈퍼마켓에서 무료로 제공하던 플라스틱백은 사라진 지 오래라 종이봉투에 담아 가거나 가져온 장바구니를 이용한다. 그렇다고 100% 무포장은 아니다. 블루베리, 방울토마토나 딸기 제품 등은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있어 분리수거를 따로 해야 한다. 여기 슈퍼마켓에는 원산지 표기가 잘 되어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호주산도 많고 의외로 마늘이나 생강은 중국산이었다.  


카운트다운 슈퍼마켓의 무포장 채소 과일 코너 (이미지 출처: bayfair.co.nz/stores/countdown/)


저렴하면서도 고퀄인 고기 제품과 유제품의 향연

  낙농업의 국가답게 고기 매대와 달걀, 우유, 치즈,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초콜릿 등 유제품 매대는 말 그대로 눈이 황홀해지는 넘사벽의 수준이다. 우선 퀄리티 높은 고기들이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예를 들어 현지에서 풀을 먹고 자란 스테이크용 소고기 600g이 13.9 NZD, 원화로 11,200 원 가량이다. 사람보다 소와 양의 수가 더 많은 나라인지라 양고기도 부위별로 다양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심지어 생닭은 포장 패키지에 지역명과 더불어 자연 방사형에 카본 제로 인증을 받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플렉스테리언으로서 고기 소비량을 줄이려고 노력하지만 내 의지는 쉽게 꺾이고 만다.


  뭐니 뭐니 해도 슈퍼마켓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너는 바로 아이스크림 냉동고 매대와 초콜릿 매대이다.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에 바라보기만 해도 매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할 지경이다. 심지어 비건을 위한 제품도 여러 종류가 있다. 뉴질랜드에 올 때마다 내 체중이 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몇몇 재벌 식품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여기에는 글로벌 기업과 현지 기업이 서로 경쟁하며 스토리텔링과 재료, 맛을 앞세워 소비자를 유혹한다. 개인적으로 카피티(KAPITI)의 아포가토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데 기회가 되면 맛보기를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와이토아 지역에서 카본 제로 인증을 받은 자유방사형 생닭의 포장 패키지 © 2024 킨스데이


뉴질랜드 슈퍼마켓의 아이스크림 냉동 매대 모습 (이미지 출처: epta-asiapacific.com/en/newsroom/latest-installation)


K-푸드의 위상

 하지만 요 몇 년 새에 뉴질랜드 슈퍼마켓 매대의 눈에 띄는 큰 변화라고 하면 "International" 카테고리가 꽤 커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 한국 제품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내가 자주 애용하는 타우랑가 베이페어 쇼핑몰에 있는 카운트다운 슈퍼마켓의 경우, 몇 년 전에는 오뚜기의 진라면 순한 맛과 매운맛 정도의 컵라면류만 있었는데 올해는 농심의 신라면과 육개장, 김치맛 컵라면이 추가되었고 농심의 신라면 봉지라면, 삼양식품의 불닭 봉지라면 등이 매대에 들어왔다. 이뿐 아니라 초코파이, 커스터드 케이크, 양파깡과 새우깡 등 과자들이 새롭게 입점되었다. 김류는 일치감치 올가닉, 건강식품 코너에 별도로 진열되었고, 고추장은 물론 신선 매대에 김치까지 입점되어 있었다. 이제는 굳이 한국에서 여행 캐리어에 바리바리 챙겨 올 필요가 없을 정도다. 지난주에 마운트 망가누이의 뉴월드 슈퍼마켓에 갔다가 백인 직원에게 "Where is Kimchi?"라고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신선코너로 데려가 김치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로컬 슈퍼마켓에서 K-푸드의 위상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뉴질랜드 현지 슈퍼마켓에 진열되어있는 K-푸드 제품들 © 2024 킨스데이


  뉴질랜드에서 K-푸드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하루아침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현지 신문 기사와 데이터, 현지 교포와 지인과의 대화를 기반으로 그 이유를 세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보있다. 첫째, 뉴질랜드의 이민자 수 증가와 아시아인 커뮤니티 확대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뉴질랜드 정부는 외국인 노동인구 확보를 위해 "이민자 껴안기" 정책을 적극 펼쳤다. 그 결과, 뉴질랜드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9월 기준 전년 대비 13만 명의 인구가 늘어나 전체 인구가 526만 명으로 30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지 한인 매체인 더 코리아 포스트에 따르면, 2023년 입국 이민자 중 인도, 필리핀, 뉴질랜드, 중국, 피지, 남아공 순으로 많았고, 한국 이민자 수도 전년 대비 85.8% 증가한 2,545 명이 입국을 했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뉴질랜드 인구 중에 한국인도 늘어났고 아시아인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둘째, 이른바 K-컬처의 영향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뉴질랜드 콘텐츠산업 동향>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뉴질랜드 구독 VOD 플랫폼 중에서 넷플릭스가 40%, 디즈니 플러스가 9%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글로벌 OTT에서 한국 콘텐츠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뉴질랜드에서 한국 콘텐츠의 노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4년 전에 오클랜드에서 우버를 탔을 때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방글라데시인 운전기사가 <킹덤 2>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었다. K-POP의 경우, 오클랜드 시내 중심에 있는 음반 가게에는 한 벽면을 가득 차지할 만큼 현지 청소년 대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주에 만난 초등학생인 현지 친구의 딸은 테일러 스위프트 다음으로 블랙핑크의 제니를 좋아한다고 내게 말했다. 뉴질랜드에서 유학을 했던 제니는 여기서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K-치킨 레스토랑이 오클랜드와 타우랑가를 중심으로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클랜드의 한 서점의 요리 코너에는 K-푸드에 대한 요리책이 판매되고 있었다. K-컬처에 노출된 뉴질랜드 소비자들이 K-푸드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것이다. 셋째, 뉴질랜드가 작지만 까다로운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식품 기업 해외영업 부서와 현지 총판의 수많은 소통과 협업, 그리고 코트라 오클랜드 무역관과 같은 중간 조직의 정보 지원 등 관련 이해관계자의 끈질긴 입점 노력의 산실이다. 지인이 대기업 식품회사 해외영업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신규 해외 시장 진출의 경험담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을 정도였기에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소비자로서 편리해진 장보기에 감사함 마저 느낀다. 식품 마케팅을 했을 당시 사람들의 식습관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뉴질랜드 현지에서의 K-푸드 열풍이 단순한 유행이 아닌 오랫동안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더 크게 확장되기를 바란다. 쿠팡에서 퇴출된 햇반이 알리에 입점됐다는 기사를 접했는데 뉴질랜드 현지 슈퍼마켓에서도 햇반과 두부 등 좀 더 다양한 한식 재료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으로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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