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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Mar 21. 2024

마라톤은 러너를...

두 번째 마라톤

2023년 JTBC 마라톤.

나의 생애 첫 공식 풀코스 마라톤 대회였다.

대회 전, 장거리 훈련으로 두 번 정도 42킬로미터를 달리긴 했지만, 진짜 대회와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그리고 지난 3월 9일, 드디어 두 번째 풀마라톤을 완주했다.

2024 Saipan International Marathon.

작년엔 JTBC 대회 참가를 위해 사이판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야 했지만

이번엔 한국을 비롯한 9개국에서 작고 조용한 섬 사이판으로 마라톤 대회를 위해 러너들이 모였다.

아무래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열리는 잔치이다 보니, 심리적인 부담이 훨씬 덜하긴 했다.

하지만 때마침 한국에서 온, 친구들의 방문과 겹쳐서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아줌마 네 명의 첫 사이판 방문이다 보니, 손님맞이에도 소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와중에도, 그간의 훈련과 노력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비교적 담담하게 대회날을 맞이했다.

열대 지방의 특성상, 일단 날이 밝고 해가 떠버린 후엔, 달리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잘 알기에

되도록 너무 더워지기 전에 피니쉬 라인에 들어오고 싶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래서 대회 출발 시간도 새벽 4시 30분. 사실 30분 정도 더 일찍 출발했어야 했다.

모든 초보 마라토너들의 로망이라는 서브 쓰리를 비롯한, 4시간 이내 골인 주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참가자가 기본적으로 4~5 시간, 혹은 6시간을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 동안 매주 토요일 새벽 4시부터 함께 모여, 힘든 장거리 훈련을 해왔던 동료들과 출발 직전까지 서로 격려하고 파이팅을 외치며 응원했다.

일단 마라톤이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철저히 계획한 대로, 하지만 내 몸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해서 혼자만의 길고 힘든 여행을 해야만 한다.

수백 명이 함께 호흡하며 같은 주로에서 달리고 있지만, 남을 의식하거나 조바심 내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나만의 레이스를 펼쳐야만 한다.


그런데 레이스 초반에, 같이 훈련하던 친한 동료가 내 옆에 바짝 따라붙으면서 내 계획이 조금 흐트러졌다.

그 친구는 훈련 중 무릎 부상을 당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워낙에 잘 달리던 친구였고 악바리 근성이 있었는데, 무조건 나를 따를 테니 같이 가잔다. 차마 각자 알아서 달리자고 거절하지도 못하고...

어쩌다 보니 그 친구와 20킬로 지점까지 함께 달리게 됐는데, 내 에너지 젤이나 포도당 캔디도 나눠주고 현재 페이스도 알려주며 본의 아니게 페이스 메이커 노릇 비슷한 걸 하고 있었다.

'나참... 내 코가 석자이고 제 앞가림도 겨우 하는 주제에 옆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니...'

20킬로 이후에 무릎 통증 때문에 속도가 떨어지며 멀어져 가는 친구를 뒤로 하고. 그 이후엔 드디어 혼자만의 레이스를 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거창한 목표나 욕심 같은 건 없었다.

작년 11월 한국에서 열렸던 대회보다 훨씬 힘들걸 예상했기에...

물론, 대회 코스도 이미 여러 번 훈련으로 달려봤던 지라 익숙한 상태이고 현지인이라는 장점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습하고 무더운 기후와 뜨거운 햇살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지 알기에, 그저 무사 완주만을 바랐다.

조금 욕심을 내자면, 작년 기록을 조금 앞당겨 보는 것 정도랄까.


마라톤 고수들부터 나 같은 초보까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진정한 마라톤은 30킬로 이후부터 시작되는 거라고.

그래서 30킬로에 이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오버 페이스하거나 자만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그 말을 유념하며 그럭저럭 35킬로까지 초반 페이스를 잘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그 이후, 다리가 무거워지고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치명적이진 않았다.

이미 해 뜬 지는 오래이고, 온몸은 땀에 젖다 못해 땀방울을 바닥에 흩뿌리며 달렸다.


38킬로 지점, 갑자기 허벅지와 종아리, 심지어 발가락까지 움찔움찔하며 쥐가 나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틈틈이 식염 포도당도 먹어가며 수분 보충하면서 달리고 있었는데...

당황스러웠고 더럭 겁이 났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번엔 오른손이 이상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른손 손가락들이 안으로 굽어서 뒤틀려있었다.

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판단했다.

'여기서 무리하거나 욕심을 부리면 훨씬 더 힘들어지고 무사완주도 어렵겠구나.'

그때까지 이를 악물고 겨우겨우 유지해 오던 페이스를 확 낮췄다.

저게 과연 걷는 건지 달리는 건지 싶을 정도로...

그렇게 후반 3킬로를 초 슬로우 페이스로 힘겹게 다리를 끌다시피 하며 처절한 레이스를 펼쳤다.

드디어 골인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 몇 백 미터가 몇 킬로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던 것은 마라톤을 뛰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자세는 이미 무너져서 엉망이 됐고 멘털은 저 멀리 가출한 지 오래인 상태로, 그저 앞만 바라보며 골인 지점을 향해 본능적으로 달려왔던 시간들.

작년 대회에서는 골인하고도 1~2 킬로 정도 가볍게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면, 올해는 조금만 더 거리가 길었으면 거품 물고 쓰러져 버렸을 것 같은 컨디션이었다.

피니쉬 라인에서 이제나 저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과 남편은, '도대체 저렇게까지 하면서 달릴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어쨌든 이제 끝났다.

앞으로 내가 달릴 수많은 마라톤 대회들 중, 겨우 두 번째 레이스를 마친 것뿐이다.

얼마나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얻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얼마나 다양하고 짜릿한 경험들을 하게 될지, 지금부터 신이 난다.


마라톤은 러너를 겸손하게 한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대회 때마다 힘든 건 똑같다고 한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를 했어도 생각지도 못한 변수나 돌발상황을 만날 수 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한 마라토너라도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완주하지는 못한다.

마라톤은 나 혼자만의 경기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라면서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주로에서 열렬히 응원하며 흥을 북돋우는 사람들, 급수대에서 자원봉사하며 파이팅을 외쳐 주는 사람들 등, 출발 지점부터 골인 지점까지 달리며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순조롭게 달리기 어렵다는 얘기다.


마라톤은 러너를 공부하게 한다.

다음 대회에서는 좀 더 편하게 달리기 위해, 좋은 기록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체크하고 관리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찾고 연구하며 더 나은 러너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한다.

요즘은 전문가에게 비용까지 지불하고 아예 수업을 들으며 제대로 마라톤을 배워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비록 작년 기록을 경신하진 못했지만 많이 늦지는 않은, 16초 정도 늦은 기록으로 골인해서 여자부 전체 3위를 기록하며 사이판 마라톤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니야. 역시 마라톤은 30킬로가 아니라 35킬로미터 이후가 찐이야.'

'올 가을에 있을 춘천 마라톤은 언덕이 많아 힘들다는데... 언덕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 하나.'


세 번째 마라톤이 될 춘천 마라톤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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